BLOG ARTICLE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my life/오늘 | 57 ARTICLE FOUND

  1. 2012.06.09 학기 끝! 4
  2. 2012.01.24 오랜만의 통화에서 2
  3. 2012.01.24 새해
  4. 2011.12.14 이제 곧 방학! 2
  5. 2011.12.07 12월과 1월의 소박한 계획 5
  6. 2011.11.16 그냥 일기
  7. 2011.11.13 오늘의 일기 6
  8. 2011.09.30 개강 1
  9. 2011.09.15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벌써!) 1
  10. 2011.09.08 2011년 9월 7일

정말 얼마만에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한번 안쓰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 걷잡을 수 없이 낯설어져버렸다.

그저께 논문을 무사히 제출했다. 애초에 마음 졸이고 스트레스 받았던 것에 비해 일할거 다 일하고 놀거 다 놀고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엄청 참았던 거지만) 잘거 다 자면서 너무 편안히 마무리해서, 기분이 좀 이상하다. 잘 있다가도 더럭 겁도 난다. 이거 뭔가 내가 큰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이렇게 순조롭게 논문을 내는 게 정상인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문득 보면 혼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하지만 뭐 이런 식으로 논문을 쓰는 것도 몇년째이니 어느정도 손에 익을 법도 하니.

제대로 냈을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더군다나 이미 내버렸고 기한도 지났으니 뭐. 몇번이고 다시 점검했었으니 아마 별 문제 없겠지.

그래서 그제부터는 이른바, 뭔가 이 나이에 ?? 부끄럽지만, 자유의 몸인데.

막상 거창하게 할 일은 없는 상태다. 어제 아침부터 후배가 잠시 와있다가 방금 바래다주고 돌아왔기 때문에 어제는 딱히 따로 한 일이 없었고

(아! 6월부터 우리 것이 될 차 시승식을 했다 퍼붓는 빗속에서)

오늘도 보리랑 셋이 몽마르트르 다녀온 것 외에는...

기상 조건이라도 받쳐준다면 당장 기차라도 타고 보리랑 숲에 갔겠지만 날씨가 워낙 오락가락하고 아직도 쌀쌀해서 그럴만한 흥도 나지 않는다. 물론 보리가 뛰어놀기엔 지금 날씨가 낫겠지만.

내일부턴 뭘하지.

일과 논문에 밀려 미처 읽지 못한 에드워드 사이드 책도 좀 읽고 싶고

논문 심사 준비도 틈틈히 착실히 하고.

그동안 못 만난 사람들도 좀 만나고. 다빈치보러 루브르도 가야할테고.

뭣보다 혼자 조용히 생각하며 많이 보내고 싶다. 느긋하게, 하지만 헛되지 않게 보내야지.

일단 내일 시장에 가서 식량을 마련하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어야겠다.

따뜻하지 않아도 좋으니 좀 맑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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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3년 동안을 계속 알고 지내온 친구와 오랜만에 한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아직도 초밥을 먹을 때면 내 생각을 하게 된다며
지난 여름 식중독에 걸리던 날에도 슈퍼에서 파는 포장 초밥을 먹으면서
내 생각도 조금 하고 했다는 말에.
아 태어나서 다행이다, 내 의지도 아니었던 일에 괜히 보람을 느꼈다.
(아팠다니 걱정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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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때문인지 유독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2012년이 핸드폰 화면에 달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차지한지 벌써 22일이나 지났다. 친구들과 통화하거나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이야깃거리는 단연, 이 나이 먹을 동안 대체 뭘 했냐는 자문 내지는 푸념이다. 2년 전 내가 26살이 되었을 때 엄마가 내가 스물 일곱인 줄 알고 징그럽다며 깜짝 놀라시던 기억이 정말이지 생생한데. 이제 스물여덟이나 먹은 딸에게는 도리어 아직 젊다 위로하느라 애쓰시는 걸 보니 푸드득 웃음이 난다.
그동안 뭘 했느냐는 한탄이란 뭔가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넋두리를 주절주절하고 돌아온 저녁은 어쩐지 스스로에게 창피한 기분이었다.
내가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창피함이 아니다.
내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어떤 대단한 것들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창피함이다.
보들레르처럼 글을 쓰고 싶었던 23살, 마냥 정신이 없었던 24살, 일은 재밌고 공부는 힘들어 갈팡질팡했던 25살, 그저 다 그만두고만 싶었던 26살, 새옹지마 전화위복을 온 몸으로 실감했던 지난 해, 나는 내 그릇에 맞는, 나의 자격에 맞는, 내 시간의 흐름에 맞는 일들을 해왔을 뿐이었다.
그 무엇도 쓸데 없는 일은 없었다. 당장 자축하는 화환을 내걸고 대리석 기념비를 세울 꿈 꿀 것 없다. 더 갈고 닦자. 나의 날들은 내가 준비했던 만큼만 채워져왔다.
올해도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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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방학이 신나게 느껴지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지난 몇년동안 방학이고 주말이고 평일이고 학기중이고 거의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새삼 방학이 무척 반갑다.
오늘은 정말 아쉬운 풀로 선생님의 학기 마지막 강의가 있었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몰아치고 어두컴컴한데다 8분이나 기다려 겨우 탄 버스는 중간에 완전히 길이 막혀버려 20분을 한 곳에 그냥 서있었다. 그래서 결국 수업에 15분인가 20분이나 지각. ㅠㅠ 첫 부분을 놓쳐서 너무 아쉬웠다. 오늘 수업 주제는 Musée d'histoire de France, 프랑스 역사박물관의 tentatives de "définition" (si possible), histoire, typologie, 그리고 결국 프랑스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란 오늘날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교수님은 정말 내가 아는 , 아마 내가 직접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마도 가장! 박학다식한 분인 것 같다. 박물관과 서유럽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정말 깊고 넓기 이를데가 없다. 정말 매번 깜짝 놀란다. 박물관과 근대사 - 딱 두 단어일 뿐이지만 박물관? 근대사? 어마어마하게 넓은 분야다. 게다가 유머감각도 있고 말씀도 정확한 용어들을 사용해서 딱 부러지게 하시기 때문에 수업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지루한 줄을 모른다.
이런 분에게서 지도를 받는다는 것이 큰 행운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여기저기서 부르는 곳도 많고 찾아오는 학생, 연구자들도 너무 많아 교수님한테 내가 누군지 알게 하려면 아마도 더욱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제 새벽 세시까지 과제를 했는데... 5일과 9일날 둘다 발표도 하고 레포트도 제출해야 했고 13일까지 이 과제 제출이라 너무 시간이 없어서 진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꽁꽁 때려가면서 겨우 했더니....... 못한 사람들은 이번 주말까지 내라고......ㅋ 나보다 불어도 (당연히) 잘하고 시간도 더 있는 프랑스 애들 과제에 비교돼서 내 과제물이 너무 처절하게 잊혀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아 그리고 수업 끝나고 inha 객원연구원이고 다음학기 우리 전공필수 수업을 맡은 passini씨와 논문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조언을 들었다. 아담한 체구에 무척 상냥하고 또 젊은 (나보다 5살이나 많으려나?) 이탈리아 여자분인데 곧 출판될 그녀의 논문 주제는 "국가주의와 미술사 (nationalism in art history)"다. 내가 공부할 주제와 공통점이 많다.
이번 학기들어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극도 많이 되고 또 반대로 자신감도 생기고. 어쨌든 예전과 달리 주눅들지 않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좋다.

내일모레 오전에 역시 고고학사 마지막 수업이 있고 이제 정말 끝! 물론 1월달에 고고학사 기말시험을 봐야 하긴 하지만... 아직 한달 남았으니 ^^  ^^
막스의 1844년 수고를 비롯한 초기 저작들과 프루스트, 위고를 읽고 카르나발레 19세기 파리 민중사 전시와 유대역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발터 벤야민 archives 전시에 꼭 가볼 생각이다. 내일모레 금요일엔 친구랑 오르세에 가서 oscar wilde의 영국 romantisme 전을 관람하기로 했다.
그리구 한번은 보리랑 기차타고 근교에 나가서 산책을 하고 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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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이다.
마지막 달...
사실 연도는 그냥 숫자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냥 매일 매일 연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인데
사람을 이렇게 조바심나게도 하고 후회에 젖게도 하고 새로운 결심에 설레게도 하고 신기하다.
사실 이런 생각 자체도 매년 이맘때 늘 되풀이하는 똑같은 혼잣말일 뿐이다.

지금 나는 기말평가 기간 한 가운데에 있다.
그저께 월요일날 "서울의 박물관들 - 과거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 이라는 제목으로 30분 짜리 발표를 하나 마쳤다. 가뜩이나 인원이 적은 수업인데 하필 또 네명이나 결석을 하는 바람에. 아주 알콩달콩 정겨운 분위기에서 발표를 하게 되어서 확실히 긴장도 많이 하지 않고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지만 ... 그래도 무척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쉽기는 하다.

내일 모레는 박물관학사 수업 발표와 과제물 제출날이다.
테이트 리버풀에서 본 "This is Sculpture" 전시를 주제로 삼아 이를 분석해야 한다. 사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써져서 지금 조금 여유를 부리고 있다. 심지어 재미가 있었다. 역시 나는 비평하는 게 재미있다. 내가 만들지는 못하면서... ㅎㅎ 하긴 사실 현재의 내 지식과 경험으로는 할 수 있는게 보고 읽고 분석하는 것 뿐이다. 또 직접 창조를 하기 보다는 평을 정말 "잘" 하기 위해서 지금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 그리 죄책감 내지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그닥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가만 보면. 뭐야 왜 쓴거지. 어쨌든 지금 내가 하는, 해야하는 일이 무척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13일날 아침에 제출해야 하는 지도교수님 수업 과제인데.
이건 정말 잘해야하는데. 사실 지금 9일날 과제를 얼기설기 끝마쳤다고 정신 놓고 놀고 있을게 아니라 어서 13일 과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터다.
이 싫고 귀찮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이라니.
아참. 과제 얘기를 줄줄이 쓰려고 했던 건 아니고.

프루스트의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와 위고의 les miserables 를 이번 겨울엔 다 읽고 싶다.
레미제라블은 어릴 때 정말 정말 좋아하던 소설인데 여기 와서 프랑스어로 다시 읽으려고 작년에 책을 사뒀다가 그동안 제대로 짬을 내지 못해서 흐름을 아직 타지 못하고 있다. 프루스트 역시 아직 제대로 깊숙히 들어가지 못해서 초반 열 몇장 정도만 매번 펼칠 때 마다 반복하고 있는 정도이지만 그래도 요즘 그 순환?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스스로 기특해하는 중 ㅋㅋ 아 창피해.
프루스트를 정말 꼭 읽고 싶어야겠다 결심한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인데, 커피 끓이면서, 보리 밥 주면서, 환기시키려고 창문 열면서 나도 모르게 프루스트 식의 표현과 단어들을 되뇌이고 있음을 깨닫고 부터이다. 20세기 프랑스 산문 문학은 프루스트 없이는 성립이 안된다고들 하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첫 열 몇장만 지치지도 않고 반복하고 있는 불성실한 독자에게도 이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1월 중순에는 아무래도 아빠를 보러 한번 짧게 다녀오고 싶은데... 모르겠다 페리 값이 비싸고 아직 고고학사 시험 일정이 안나와서.
2월 2일날 어차피 다시 런던에 갈 거고 영우랑 아빠랑 그 달 말까지 함께 시간을 보낼 테니 굳이 또 갈 필요는 없나 싶기도 하고. 2월 한 달은 정말 너무 바쁘고 복닥복닥 즐겁겠지만 2월 말이 되어서 아빠와 영우가 한꺼번에 한국으로 돌아가버리면 아무래도 쓸쓸해지지 않을까.
이것봐라. 그새 또 프루스트 책에서처럼 아직 오지도 않은 사람들을 떠날까봐 애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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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갑자기 너무 추워서 방금 밤 아홉시 반쯤 산책을 나갔을 때는 털모자를 써야 했다.
하지만 장갑까지 꼈다면 좀 더웠을 것 같기도...
내일 모레는 하필이면 수업 두 개가 연달아 있는 바람에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집을 비워야 해서 보리가 조금 마음에 걸린다. 뭐 조금 힘들더라도 알아서 잘 있겠지만... 못내 걱정이 되어 친한 친구에게 오후 쯤 우리집에 좀 와서 책 읽고 차 마시고 있어줄 수 있을지 부탁을 해두었다.
보리가 없어서 하루종일 내 마음대로 밖을 쏘다녀도 되었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그때보다 지금이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그런 적이 있었구나, 새삼 깨닫는 정도다.

보리랑 산책할 때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은 둘이서 같은 속도로 나란히 뛸 때다.
보리는 내가 뛰면 같이 뛰고 서면 자기도 선다. 나랑 보조를 맞춰서 걷는 이 네발 짐승 이럴 때 정말 아빠 말대로 종(種)을 뛰어넘는 순수한 마음의 교감을 느낀다. 이 밖에도 기분이 너무 좋아 마음이 벅차오르는 순간이 꽤 많이 있지만서도. 보리랑 뛰는 게 정말 즐겁다. 방금은 너무 열심히 뛴 나머지 큰 털모자가 내 눈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서 곤란했다.

오늘은 루브르에서 1996년, 전설적(?)인 큐레이터이자 교수였던 Louis Courajod 루이 꾸라조의 사망 100주년을 맞아 열었던 콜로키움의 자료집 "Un combat pour la sculpture" 를 읽었다. 사실 작년에도 여러번 들여다 보았던 책이지만 그때랑은 조금 다른 목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읽으니 또 달랐다. 골치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루이 꾸라조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참으로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도 나는 누군가의 문체, 결국은 글이겠지만, 어조에 감동을 받으면 그 사람을 학자로서 존경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꾸라조는 워낙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훌륭한 학자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점잖지만 확신에 찬, 혹은 결의에 찬 어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누군가의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평가했을 때보다는 글의 문학적인 요소들에서 좋다 혹은 싫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래서 나는 선행연구 분석 (historiographie)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번 논문은 주로 한 사람의 저작과 활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의 monographie 에 가까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지만 감정적으로 생각해서 글을 쓰면 아주 엉망진창이 될 텐데 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꾸라조의 루브르학교 강의록을 소장하고 싶어서 구입했을 정도로 그의 말과 글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데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내가 그 이유를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일단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읽을 것은 Elizabeth Emery 와 Laura Morowitz가 함께 쓴 "Consuming the Past : The Medieval Revival in fin-de-siecle France" 라는 2003년 책으로 지금까지 나온 (+ 내가 접한) 학술서들중에선 내 관심 분야와 가장 많이 근접해있는데, 그래서 좀 읽기가 무섭다. ㅎㅎ내가 하려고 했던 말들이 다 들어있을까봐 조마조마. 그래도 이 책은 박물관학이나 박물관, 전시 史 의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는 건 아니니까.......구멍이 있겠지 어딘가.!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보니 내가 잘 보이는 위치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 누운 보리가 너무 사랑스럽다.

관악기들의 매력을 몰랐는데 요즘 클라리넷과 바순이 너무 좋다.
얼마전 라디오클라식의 passion classique에서 Michel Portal 이 본인이 옛날에 연주했던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를 들려주었는데 갑자기 마음에 확 들어왔다. 방금도 무슨 바순 콘체르토인가를 들었는데 좋았다. 이름을 확인해 본다는 걸 놓쳤네. 그래도 바순은 나는 교향곡이나 관현악곡에서 듣는 게 훨씬 좋더라. 클라리넷은 독주로 들을 때 더 오묘한 맛이 있는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악기지만 얼마전 Laurent Korcia의 신보에 들어있는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너무 좋아서. 그런데 하이페츠가 본좌 ㅎㅎ라기에 찾아 들어보니 역시... 근데 코르시아의 매끈하고 풍성한 새 녹음도 편히 듣기에는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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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처럼 나도 마음잡고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읽고 싶은"이 아니라 정말 읽어야 만 할) 눈에 밟혀 며칠 전부터 제목만 써놓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 한 문장 안에만해도 스트레스를 생성하는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이를 다시 되뇌여보는 나의 마음은 황무지와 같다.

오늘 아침에도 조금 느지막히 산책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젯밤 너무 늦게 잠들기도 했고 토요일이라 출근 인파가 없어 좀 여유를 부린 탓도 있다. 어제 꽤 늦은 시간에 보리를 데리고 나갔었으니 한시간 쯤 늦어져도 괜찮겠지 싶었기도 하고. 보리는 내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후부터 부쩍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목걸이만 손에 들어도 나에게 마구 뛰어와 부비질 않나, 문을 여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질 않나, 별일이다. 그리고 부쩍, 우리 동네를 자기 동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예 모르는 곳이나 인파가 많은 곳에 가면 나만을 의지하며 멈추지 않고 바짝 따라 오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다니는 늘 같은 산책코스에서는 나름 주변을 "관리"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쪽 저쪽으로 겁없이 쏘다닌다. 함께 똑바로 걷는데 꽤 엄격한 나이지만 친근한 장소에서 친근한 다른 개들 흔적을 찾는 것 뿐인데 너무 빡빡하게 굴 것 있겠나 싶어 조금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 그래도 5-10분 정도는 꼭 내 발치에서 얌전히 걷게 하니 아마도 크게 잘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Quai Branly 박물관의 도서관 - 엄밀히 말하면 mediatheque - 이 그렇게 분위기도 괜찮고 좋다기에 계속 벼르다가 오늘 오전에 처음으로 한번 가 보았다. 원래 다니던 2구의 INHA 미술사도서관과 13구의 BNF가 내 전공 책들을 찾아보기에는 최고지만 가는 길이 멀어서 보리를 키우기 시작한 후로는 각각 다섯번도 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께 브렁리 박물관은 버스만 제시간에 와준다면 15분 내에 갈 수 있고, 여차하면 자전거로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 곳의 도서관이 괜찮다면 나한텐 정말 꽤 좋은 일이다. 11시나 되어야 열지만 저녁 8시까지는 열려있고 무료인 것도 큰 장점이다.
께 브렁리 박물관 안뜰의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늘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도 역시 보기 좋더군. 지금은 마오리족 문화 예술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에 갈 때 한번쯤 들러보아도 좋겠다. 께 브렁리 박물관은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제3세계" - 즉 이곳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비서구권 민족과 나라들의 문화 예술과 유물을 다루는 상당히 쿨한 곳으로, 예술과 인류학과 민족학과 역사학이 어우러진 상당히 쿨한 곳이다. 재작년에 재즈 음악 전시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요즘 나는 내 인생 덜렁이 시기의 최정점에 있기 때문에 역시나 준비물인 증명사진을 잊었지만 수염쟁이 아저씨는 집에 가서 직접 붙이라며 흔쾌히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쨌든 도서관은 환상적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아주 넓고 두꺼운 나무 책상과 적절한 조도, 전부 통유리로 세느강을 향해 확 트인 공간이 정말 최고였다. 연지 얼마 안 된 시간이어서 아직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사람도 거의 없어서 무척 조용했다. 책도 금방 찾아다 주었고.
앞으로 자주 가야겠다. 가까운 곳에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오랜만에 모노프리에 들러서 먹을 것들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보리가 없을 때는 모노프리에 일주일에 두세번은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근 3주 만에 처음 갔다.
다녀와서 보리를 데리고 다시 나가 얼마전 주문했던 보리 사료를 찾아가지고 왔다.
소포 안에서 벌써 사료 냄새가 나는지 엄청 킁킁대더라. 개는 개야.


글 쓰다말고 보리 잘 있나 보러 가서 엉겁결에 보리를 품에 안고 재웠다. 보리는 코골고 나도 그걸 듣고 있다보니 약간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1악장이 거의다 끝날 때 까지 안고 있었으니 꽤 오랫동안 한 자세로 보리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밖에서 소리가 나서 보리가 고개를 번쩍 들기에 소파에 얌전히 내려놓고 왔는데 왼팔과 허리가 무지 아프다 ㅋㅋ 윗 사진은 며칠전에 찍었던 거였는데 방금도 똑같은 옷에 비슷한 자세로 보리를 재웠다. 오늘은 다만 내 어깨 쪽에 머리를 기대고 자더라. 아이고 귀여워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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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금까지 살면서 몇번의 새학기를 맞이했던 걸까 생각하니 몸이 으드드 떨린다.
어쨌든 셀 수 없이 많았던 그 새학기, 또 하나를 맞았다.
그래도 이번 개강은 좀 각별하다.
그동안 나름 열정과 애정을 (공통분모는 "정".) 을 가지고 공부했던 중세미술사를 결국은 한켠에 밀어두고 새로운 교수님과 새로운 전공을 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일이 잘 풀리게 되어 참 다행이고 그래서 이 글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거지만, 여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돌아왔나,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 지난 날들이 후회스럽고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랬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다. 이제서라도 내게 기회가 주어지고, 일종의 고비를 넘었으니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심지어 훌륭하게) 앞으로는 지금 내가 절실하게 생각하는 이 모습대로, 지금의 마음으로, 잘. 해야할 것이다.
이번 여름을 지나오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의 행동에 대해, 말에 대해, 시간에 대해, 나아갈 길에 대해 더욱 깊고 진지하게, 보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제는 보리도 있으니 적어도 외로움과 자기연민에 헛되이 시간을 보낼 일은 없을 거다.
참으로 진부한 말이지만 나의 가장 큰 적은, 가장 큰 약점은 나 자신이었다.

박물관학과 박물관의 역사는 프랑스에 처음 유학오면서부터 꼭 하고싶었던 공부인데다 나를 지도해주기로 하신 교수님은 그 분야에서는, 그리고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이다. 더군다나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없이 모교에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다. 새학기, 새 선생님, 새친구들, 새 공책, 새 교재들인데 강의실들만 익숙하다.
벌써 두번의 수업을 들었는데 무척 기분이 좋다.
지도교수님의 수업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학술적 접근들) 은 정말 고작 몇단어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정말 너무 재미있고 학부 때와 석사 때 하던 것처럼 예습복습도 하고 필기도 하게 되어서 즐겁다.
열심히 해야지.

어제는 아빠랑 보리랑 Rambouillet 근처의 숲에 피크닉 겸 산책을 갔었는데
더웠지만 나무 그늘은 선선하고 저녁 공기는 청량하고 하늘은 푸르르고 참 좋았다.
그게 벌써 어제라니 새삼 아쉽다. 시간이 잘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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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그리스 채무불이행 시나리오의 기정사실화, 2011년과 2012년에 우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자연재해 예측들에 대한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떨리고 힘이 빠진다. 세상엔 너무 많은 나라가 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너무 많은 "사실"들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원하건 원치 않건 알게 되는 것이 가끔 싫고, 어쨌건 사실 그 상당수가 은폐되어 있고 나는 영영 모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유쾌하지 않다.
무서워서 자고 있던 보리를 억지로 품에 안고 컴퓨터 앞에 와서 나머지를 읽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내 옆에 있어 안심이 된다.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살고 있는 따라서 나와 같은 처지인 동맹군이 있다는 것. 더구나 이 친구는 나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말을 시키지도, 겁을 주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옆에 있어 줄 뿐이다. 같이 살아갈 뿐이다.
보리의 꾸미지 않은 - 개이므로 당연한 - 무신경함, 순진함, 무지함이 이런 밤 나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
그저 나에게 닿아있는 것이 좋아 내 의자에 몸을 찰싹 붙이고 엎드려 곤히 자는 조그만 짐승.

내일은 플레이옐 2011/12 시즌 첫 공연이 있다. 파보 예르비 지휘의 orchestre de paris의 공연으로, 베를리오즈의 ouverture du Corsaire,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 Khatia Buniatishvili),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 예정되어 있다. 아마도 보리 때문에 1부만 보고 집에 오지 않을까 싶다. 보리가 걱정되어서라기 보다는 보리가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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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시, 보리와 함께 산책을 나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두번 산책하면서 두번 다 빵집에 들르기를 속으로 희망했으나 두번 다 실패했다 : 첫째로 avenue de saxe에 있는 빵집 앞엔 구걸...하는 아저씨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앉아계셔서 거기다가 보리를 매어두고 안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음... 내가 무서워하면 안되겠지. 그래도 아직은 좀 괜히... 그 분이 무슨 나쁜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가끔 우리집 앞에도 앉아계시는 분이라 눈에 띌까봐 싫었다. 두번째로는 avenue garibaldi에 있는 가장 즐겨찾는 빵집에 저녁에 용기를 내어 들렀지만 역시 강아지를 빵집 문에서 너무 먼 곳에 혼자 매어두어야 해서 포기했다.

처음엔 보리 할머니 조언대로 하니스를 매어 산책했는데 그저께부턴 목걸이로 바꾸었다.
처음 산책 입문을 하기에는 보리의 몸에 큰 부담이 없는 하니스가 좋았지만 벌써 열흘 정도가 지나 걷기에 익숙해진 보리에게 하니스는 이미 나를 제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되어버렸다. 보리가 불독같은 자세로 (불독 미안 비하하는게 아니다) 땅을 두 앞발로 마구 밀쳐대며 나를 사방팔방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보기에 굉장히 흉했고, 이를 제지하며 걷다보면 팔 힘도 달렸다. 어쨌든 그래서 목걸이로 바꾸었더니 보리가 전보다 좀 더 헥헥거리기는 하지만 보조를 맞춰 함께 걷기가 좀 더 수월해지고 내가 보리를 손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 나의 멘토 ㅋㅋ 씨저 밀란의 how to raise the perfect dog 그리고 루브르 책을 몇권 책상에 주욱 늘어놓고 읽고 있다. 그 중 씨저 밀란의 책은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 벌써 반 이상을 읽었을 정도. 아무래도 보리와 함께 살기가 나의 가장 중요한 가장 급한 가장 심각한 관심사이기는 한가보다.

방금 라디오 클라식에서 흘러나온 슈베르트 2대의 첼로를 위한 4중주에 번쩍 귀가 뜨였다.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이어 나오는 것은 줄리니와 LA필의 에로이카 1악장.
아이고 ㅋㅋ 보리 신경쓰느라 그동안 참 음악도 못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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