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싸이클.
두번째 공연에 다녀왔다.
오늘은 심포니 6, 7번.
이 정도의 연주를 일생에 몇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단원들이 가끔 실수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안났다면 ㅋㅋ.. 그냥 나는 멍한 채로 이게 꿈인지 생신지 분간조차 못하고 멍청하게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단원들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다 베토벤으로 보인다.
틸레만은 왕베토벤....
이렇게 자꾸 귀를 호강 시켜서 큰일이다.
내내 시간이 아름답게만 흘러갔다.
막히는 구석 하나도 없이 유유하게, 높은 산 정상에 올라서서 저 멀리 흐르는 강물과 빼곡한 녹음과 아득한 지평선을 눈 앞에 두고 선선한 바람을 그저 벅찬 감정으로 들이마시는 그런 기분으로 시간이 흘렀다. 뭐라 더 할 말도 없다 이젠.

중간중간 느낀 점들을 두서 없이 막 써놓고 빨리 자야겠다. 다른 음악이 생각날까봐 무섭다
오늘 자리는 1층 발코니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 모서리 쪽이었는데
역시 간이의자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자리를 얻은 것에 마냥 기뻤다.
어제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 왔다. 느지막히 표를 사려 줄을 서는 인파도 엄청났고 계단 통로에 앉거나 기대어서 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어제는 가깝고 시야가 탁트여 정말 훌륭한 자리였지만 관악기들과 내가 집착하는 팀파니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그런 걱정이 없었다. 덕분에 팀파니 주자를 마음껏 노려보았다. 팀파니가 왕자리에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있어서.
지휘자도 뒷모습만 보다가 약간 옆에서 보니 더 이해하기 쉬웠고. 살짝 아쉬웠던 것은 어제 제1바이올린 앞에서 5번째 줄 안쪽에 앉은 연주자 아저씨가 대단한 연기파셔서 얼굴 표정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 분이 무대에 나왔는지 어쨌는지 확인할 길 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잘 계셨겠지... 오늘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재미를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뭐야 이게 ㅋ
그리고 제2바이올린의 수석? 부수석? 아주 어려보이는 밝은 금발의 남자 연주자가 있었는데 오늘은 더 잘 보여서 재밌었다.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하더군. 지휘자와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팀파니와 피콜로 연주가 없는 부분은 너무 괴롭다.
팔짱 딱 끼고 고개 숙인 두 분의 그늘진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
그늘진게 다른게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눈썹 밑으로 그림자가 확 지는데
거기다가 팔짱 끼고 ...뭔가 되게 우울해보인다. 실제로는 뭐 전혀 아니겠지만 괜히 내가 혼자 불안하다. 저기 저 분들 빨리 파트 주라고! 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있는 것이다.
7번 할 때 피콜로 분이 아예 안나오셔서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7번에서 팀파니 파트가 워낙 많아서 역시 이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오늘 가장 칭찬 받은 사람들은 클라리넷, 오보, 플룻, 바순 그리고 호른 수석들.
어제도 그랬다 사실 ㅋ
하지만 7번에서는 플룻 약간 불안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바순도 한번 약간 삐끗했다.
하긴 그나마 그런 실수라도 안했으면 립싱큰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앵콜 없고 커튼콜 한 세번 하고 다들 후닥닥 일어나서 퇴장했다.
사실 피곤할 법도 하다. 난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오길 잘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낯익은 얼굴 되게 많이 마주쳤다 ㅋ 다들 어제 오고 오늘도 오고 또 주말에도 오겠지.

알고보니 틸레만은 kurt가 아니라 폰 트라프 대령이었다... 동안 아니잖아...
완전 풍채 좋으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냥 외모만 보더라도.
오늘은 정확히 6번 3악장 부터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1악장 2악장에서는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얼굴이 붉어짐과 함께 어제 5번때와 같은 온 몸으로 몰아치는 지휘를 시작. 멋지더라.

아 정말 그런데 6번 7번 오늘 너무 다 훌륭해서 뭐라고 더 할 말이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7번이 연주되는 매 초가 정말 너무너무 소중해서 막 씹어 삼키고 싶었다.
베토벤의 의젓하고 기운찬 교향곡들 비엔나 필하모닉과 틸레만은 그냥 다 알고있는 것 같았다. 어제 5번 4악장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되지만 그래도 오늘 연주한 곡들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 재현되었다. 뭐 역시 각자 취향인거겠지만 아 정말 7번. ..으으으
1, 3, 4 악장의 활기차고 건강한 리듬감 기분 정말 좋았다. 집에 오면서 아마 테이프였으면 벌써 늘어졌을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음반을 다시 들었는데 음 여기에 비교해도 역시 괜찮았다.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가사가 없는 그것도 긴 음악을 듣고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은 아니 뭔가 감정이 움직이는 기분을 느껴본 것은 이 곡을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설사 처음이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내가 처음이라고 하면 처음인 거니까. 그렇게 우기고 싶은 것이다. 정말 특별한 곡이다. 그때 이 2악장을 듣지 않았더라면 베토벤이 어떤 사람이건 그 음악이 어떤 것이었건 아마 지금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잘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틸레만의 오늘 연주가 좋았다고 극찬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이 2악장을 훌륭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처음의 솔 도 미 라 그 a minor?? 맞나 아무튼 그 화음이 나올 때부터 가장 끝에 그 가볍게 사라지는 듯한 미묘하고 우아한 마무리까지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흑흑 고맙습니다
그리고 7번 교향곡에서 비올라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비올라 소리가 알고 싶어서 계속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좋은 예가 있었군.

6번도 내가 상상하던 6번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청량하고 담대한. 기분 너무 좋았다.
악보 보고 공부 좀 해보고 싶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 너무 훌륭하다. 그 소리들을 만들어낸 베토벤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그렇다. 귀엽다는게 아이 귀여워 이런게 아니라 막 그... 좀 다른 느낌이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ㅠ
베토벤 전기도 사 읽어야겠네 또...

27, 28일날 남은 1, 2, 3번 그리고 8, 9번 공연이 있는데
뒤늦게 8, 9번 공연도 보러 가려 했으나 (당연히) 이미 매진이다.
또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지금의 나한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하나 더 보게되면 감상문이 감상문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어떡해 짱이야. 이걸로 요약해버릴 듯. 사실 오늘도 집에 오는 길에는 "정말 좋았다" 는 말 외에 더 무슨 말을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위에 써 놓은 것도 뭐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냥 정말 좋은 것이다. 그냥 정말 좋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순수한 기쁨과 전율과 희열 그것이 다였다.





떼아트르 데 샹젤리제. 새삼스럽게 한번 찍어봄



오늘 내 자리.



청중의 뜨거운 환호. 내 앞에 대머리..아저씨가 앉으셨는데 저렇게 왜곡되게 나와서 속상하고 죄송스럽다....



짠 오늘 숙련된 솜씨로 한 장 찍어서 완전 잘 건졌다.



아저씨 또...
그냥 사람들 얼마나 왔는지 찍어 보았다.



집에 가는 버스 기다리다가.
정류장 앞에 일반 버스가 이렇게 버젓이 무개념 주차를 해놔서 당황했는데
자세히 보니 빈필 버스라서 급방긋


AND

오늘 세상을 떠난 두 해군장병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들분께도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공연 감상문을 쓰기를 좀 망설였지만 그래도 목표한 바가 있으니.
팔자 좋은 유학생이라 이런 때 가족들 두고 멀리 타국에 있지만 정말 내내 마음이 편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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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하루에도 몇번이나 생각하고 심장이 쿵쿵 뛸만큼 기대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비엔나 필하모닉의 베토벤 사이클 첫 공연날이었다.
오래전 예매를 하긴 했지만 학생 표라 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J열 가운데열 통로쪽 자리를 주었다. 비록 간이의자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너무나도 당연히 관객들은 온 극장 안에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운좋게도 내 바로 뒷 줄에서만 두자리가 비어서 같은 학생표 출신인 어린 남학생과 잽싸게 이동, 제대로 된 좌석에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바로 뒷자리에 또 에셴바흐 할아버지가... ㅋㅋㅋ
지난 번과 예르비 공연 때 같이 정렬의 빨간색 스카프를 하고 오셨다.
에셴바흐 선생님과 같은 공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괜히 나까지 뭔가 음악인이 된 것 같았다. 우쭐하며 고개를 돌리니 막상 나와 모의하여 자리를 옮긴 꼬꼬마 학생은 오선노트를 꺼내서 숙제인지 뭔지 작곡을 하던데... 나는 급 쭈그러짐.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1부에는 에셴바흐 선생님의 강렬한 코롱 향이 진동해서 좀 힘들었다.
1부의 교향곡 4번이 끝나자 그는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가 떠나자 2부 중에는 계속 호박 물고구마 삶는 냄새가...... 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왜 고구마 삶는 냄새가 났던 걸까.
아직도 그 냄새가 코 끝에 선명히 남아있다. 뭐지 진짜. 누가 고구마 향수를...

어쨌든 오늘의 연주는 베토벤 교향곡 4번과 5번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어본 교향곡은 3, 5, 6, 7, 9번 밖에 없다. 이렇게 계속 편식을 해왔기 때문에 전곡 연주 싸이클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뭔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4번은 내가 들어본 베토벤 교향곡 중에 제일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대충 썼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건 알 수 없고, 쉽게 귀에 와 닿는 곡이었다.

사실 모르는 곡을 들으면 연주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난생 처음 듣는 (하긴 근 2-3년 안에 들은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 실황이 난생 처음이었지) 비엔나 필하모닉 공연에는 객석에건 무대에건 예상대로 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래서 사실 더 긴장하고 더 압도당했는지도 모른다. 1부가 끝나고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강력하다는 것 뿐이다.
"합주"라는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마치 내가 작년에 에릭 봉파르 피겨 보러갔을 때 - 선수들이 다들 잘하길래 어..잘하는구나 했는데 마지막에 김연아 선수가 나오니까 아...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던 경험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정도 충격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압도적이었다.

늘 연주 외의 부수적인 것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은 나는 또 틸레만의 지휘가 너무 신기했다.
얼굴은 엄청난 동안인데 - 그것도 전형적인 독일인의 얼굴 ..!!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차남 Kurt를 닮았다. - 족히 190 cm는 되어보이는 키다리에 거의 10등신. 게다가 너무 예쁜 외투를 입고 지휘했다. 등의 주름이 독특하던데. 아무튼 뭔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귀여움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머릿결이 정말 굉장히 좋고 그 비단결같은 머리를 신나게 흔들며 헤드뱅잉 하듯 지휘를 했다. 제1바이올린 부수석과 첼로 수석이 앉은 쪽을 향해 격정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확 굽혀 보면대에 머리를 부딪히는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 정말 쌔빨개지도록 열정적으로 지휘를 한다. 물론 다른 지휘자들이 얼굴이 상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덜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홍옥처럼 빠알간 얼굴은 (정말 사운드오브뮤직이다) 베토벤의 열기를 시각적으로까지 전달해주는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였다.

자리 원래 주인이 올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의자에 꼭 붙어 휴식시간을 보내고
대망의 5번.
4악장 듣고 또 울까봐 휴지도 주머니에 하나 넣어 놨다.
1악장 첫 과과과광- 을 듣고 내 머리속에는 그저 미쳤다... 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엔 이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잠시 후엔 대체 이런걸 어떻게 만든건가 하는 베토벤에 대한 찬탄과 경외심이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1악장이 주는 임팩트 만큼이나 살떨리는 연주였다. 이거 뭐 이러다간 4악장 까지 가기도 전에 눈물 콧물 다 나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훌륭했다. 넓고 깊고 풍성한 하모니와 정신 못차리게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바이올린이며 날카롭고 정확한 관악, 이미 관객들은 능동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입장이 아니라 음악에 의해 머리 한가운데를 관통당하고 있는 그런 무아의 지경이다.

어느 파트 하나 빼놓을 게 없었지만 제1바이올린과 관악 쪽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을 했다.
2악장에서도 ㅠ 정말 1악장에서 덜덜 떨다가 2악장으로 오니 갑자기 겨울밤에 귀가해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 딱 그 처음의 쩌릿한 느낌. 좋았다. 첼로와 비올라의 활약이 돋보였다. 첼로 파트만 혼자 나올 때의 그 위엄이란. 3악장도 몇몇 부분에서 합주가 정말 어마어마해서 입이 문자 그대로 쩍- 벌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어휴..

준비한 휴지를 꺼낼 일이 없었던 것은 사실 4악장에 이유가 있다. 틸레만의 4악장은 너무 빨랐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서 정말 제일 짧았던 것 같다.
정말 빠르고 패기가 넘치는 파격적인 연주였음에는 틀림 없으나 내가 원하는 4악장은 아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 환희와 괴로움과 격정을 마음 놓고 온 몸으로 흡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연주다.
숨가쁘게 달려와 가까스로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때서야, 지쳐서 바닥에 나뒹굴든 성취감에 흐느끼든 뒤를 돌아보든 할 수 있는 단거리 경주 같았다.
그 와중에도 오직 기가 막혔던 것은 그 가공할 속도를 그대로 쫓아가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모든걸 다 소화해 내는 1,2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들의 실력이다. 전부 현이 한두줄 씩 끊어져서 주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무리 숨가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두번째 주제 부분이라고 해야하나
대충 4악장 1분 쯤에 나오는 그 부분에선 약간 코끝이 시큰했다. 무서운 베토벤.....

아 ! 앵콜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곡인지 전혀 모른다  ^ ^
뭔가 오스트리아 독일 쪽 약간 19세기 말 20세기 느낌이 나는 중후한 곡이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다
+ 우와. 완전 틀렸군.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음악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내가 하루에 저렇게 80분 씩이라도 무언가에 완전히 몰두하는 일이 있던가?
나를 잊을 정도로 내 주변을 잊을 정도로 모든 감각을 다 통제하고 오직 한가지에 집중하는 시간이 하루에 몇분이나 되던가, 하는 물음.
저들에게 음악과 악기가 있듯이 나에게는 책과 글이 있는데.
하루에 최소한 80분이라도 저렇게 완전히 책 속에 빠져드는 때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읽기야 읽지. 이 말이 더 부끄럽다.

내일도 6번과 7번 공연이 있다.
오늘 5번을 듣고나니 무엇보다 7번이 몹시 기대된다.
내일 더 연구를 해보고 또 다른 발견을 해야지.

10유로 내고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는게 대단하다. 나도 자립해서 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의 나같은 학생들이 이런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정말 이렇게 좋은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게 좋은지 별론지 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마련해주고 싶다. 또 먼 훗날 포부 밝히네
일단 40분 집중 해보고 다시 말하자.....





내가 처음 앉았던 간이좌석에서 찍은 사진. 그래도 위치 정말 좋았다.
나와 같은 처지(였던) 학생이 앞에 보인다.



할아버지 얼굴이 빼꼼히 보이길래



마지막 커튼콜 때.
맨날 사진 찍고 촌스럽지만 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 같다.
틸레만 상기된 얼굴이 사진에도 보인다.


+ 같은 날 공연 리뷰가 concertonet.com 이라는 프랑스 사이트에 올라왔다.
필자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다. technically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이유가 있는 혹평이지만
그래도 5번 4악장 빼고는 난 여전히 좋았다는 생각이다.
http://www.concertonet.com/scripts/review.php?ID_review=6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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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피아노,
지휘자 모드의 아쉬케나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다녀왔다.

이제 정신없는 개학철도 지나고 완전히 "일상" 의 연속.
온 세상에 약속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은 심심한 저녁시간 그렇다면 내가 약속을 만들겠다
두둥 그것은 음악가들과의 약속

외롭지않아 외롭지않다고

아무튼
오늘은 Théâtre des Champs-Élysées 에서 기획한 Cycle Rachmaninoff (이제 프랑스에서도 v말고 ff로 쓰기로 한건지.) 의 마지막 공연날이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3일간 연주하되 매일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협연하도록 된 프로그램이다. 첫날은 엘렌 그리모, 둘째날은 Andrei korobeinikov라는, 다른 관객들 말에 따르면 루간스키보다 훨씬 젊은 러시아 연주자, 그리고 오늘 마지막 날에는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출연했다.
지난 6월 플레이옐에서의 소름 돋는 그리그 협주곡 이후로 두번째 듣는 루간스키의 연주다.

1부에는 피아노 협주곡 3번, 2부에는 교향곡 2번.
지난 날짜에는 피협 2번, symphonic dances, 그리고 죽은 이들의 섬?! 안들어봄 ㅠ그리고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그리고 교향곡 3번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 2, 3번 말고는 열심히 들어본 곡이 없어 생소하고... 교향곡 2번은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오늘 공연을 택했다.

루간스키의 피아노는, 말하자면 본인은 참 쉽게 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그런, 뭐 잘 모르지만 정말 Russian virtuoso 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인...
가끔 허공을 바라보면서 무덤덤하게, 아니 무덤덤정도가 아니라 설렁설렁, 심드렁한 얼굴로 드르르륵 치는데 무슨 뭐 이런게 다 있냐는 느낌.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도, 커튼콜을 받을 때도, 관객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할 때도, 왠지 입으로는 "아이고 뭘요.." "아우 왜요..."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제스쳐와 표정을 하고 있다.

기교적으로는 뭐 다들 말하기를 워낙 뛰어나다니 내가 굳이 더 붙일 말이 없을 것 같고
소리는 청명하고 깔끔하니 듣기 좋다. 그러면서도 폭발할 때는 유감없이.
특히 3악장은 굉장했다.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도 딱딱 맞아 더욱 좋았다.
1악장의 카덴차도 마음에 들었다.
음 그런데 1악장 첫부분에서는 솔직히 좀 어수선한 느낌이 있었다. 처음 주제가 두번째 나오기 전까지는 오케스트라도 피아노도 막 중구난방 흩어지는 느낌이. 그러나 그 이후 잘 되찾아서 뭐... 전체적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다.
앵콜곡으로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5번 (in G Major)을 연주해 주었다. 역시나 별거 아니라는 듯이 후루룩 치고 일어나 쿨하게 귀가하셨다. 라흐마니노프가 특히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쇼팽은 사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아쉬케나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는 사실 난 아주 많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커튼콜을 몇번 안하고 그냥 다들 와 끝이다 하고 집에 가는 분위기여서 좀 아쉬웠다.
그동안 수많은 콘서트에서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접했지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내가 한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한 악단이었다. 역사와 명성을 입증. 시노폴리와 클렘페러와의 연주들도 무척 좋게 들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물론 시대가 다르지만) 그냥 그 모든 것들이 수긍이 간다.
특히 관악과 저음 현악기들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그만큼 어떤 곡에서도 어떤 분위기에서도, 밑둥이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을 굉장히 흔치 않은 메리트라고 보았다. 그 덕분에 라흐마니노프 관현악 특유의 파도처럼 몰아치고 물결처럼 흐르는 바이올린 (+비올라?) 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그 둥둥 퉁기는 베이스가 더욱 잘 살아난 것 같다. 호른도 바순도 트럼펫들도 클라리넷도 오보에도 (플루트는 약간 내가 싫어하는 뷍한 소리가 나서 그냥 그랬음)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개인 실력과 합주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증말 멋지다. 으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은 처음 들어봤는데 음 굉장히 라흐마니노프 같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다던 아다지오 악장은 곡 자체가 좀 느끼했지만 그래도 유명한 이유를 알겠고 좋다고 하는 이유는 알겠더라. 1,2,4악장들은 (내 귀엔) 아주 신선하고 박력있고 또 잘 쓰여졌고 - 듣기 좋았다.
아쉬케나지는 작은 체구에서 (그 유명한 작은 손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고, 그게 심지어 이렇게 멋진 음악 소리로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니 참 인물은 인물이구나 싶었다. 되게 웃기지만 난 공연을 보면서 아쉬케나지가 무슨 마법사처럼 보였단 말이다. 피아노 협주곡이야 본인도 수십번 수백번을 연주했으니 그야말로 손에서 쥐었다 폈다 완전히 자기 것인듯 신나게 지휘하셨고 또 그래서 더 설득력있는 해석이랄까.
다른 연주를 들어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그가 지휘하는 교향곡 2번은 번개가 치고 섬광이 번쩍번쩍 하다가도 여우비가 내리고 잔잔한 물결에 산들바람이 부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곡으로 들렸다. 특히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꽉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일사불란하고 소리를 "잘" 만들어내는 악단 뒤에는 지휘자의 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특히 교향곡에서 그는 완전히 무슨 산신령같았다. 무우도사 배추도사 이런거 말고... 뭔가 그냥 spirit 같았다. 으으. 정말 좋은 공연이었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도 좋지만 지휘도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돼서 무엇보다 기쁘다.
오래오래 건강히 사시라고 간절히 기도해드려야 할 인물 리스트에 또 한 분이 추가되었구나.




귀여운 아쉬케나지 할아버지
정명훈선생님과 함께 하얀폴라파 ^_^
(사진 Theatre des Champs-Ely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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