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보리 | 4 ARTICLE FOUND

  1. 2011.10.29 오랜만의 보리 일기 2
  2. 2011.09.05 보리와 함께 파리 재발견 2
  3. 2011.09.02 보리와 둘이서
  4. 2011.05.18 Border Terrier 6


일기라기 보다는 그냥 그동안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요즘 보리와의 산책은 더없이 즐겁다. 지난달 초에도 이미 재미가 붙었다고 썼었는데, 그때의 재미라는 것은 지금 내가 (우리가?) 느끼는 데 비하면 조금 안스러울 정도다. 대략 지난 1주일 전부터 보리는 나를 따라 어디든 간다. 여기서 오는 충만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산책을 나갈 때나 들어올 때, 버팅기는 보리를 번쩍 들고 옮길 필요가 더이상 없게 되었다. 어떤 문 앞에서든 보리는 스스로 앉아서 내가 문을 열고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두컴컴한 계단도 나를 따라 거침없이 내려온다.

이제는 킥보드나 롤러브레이드를 타는 애들도,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희한하게도 아직 커다란 아저씨들, 또는 노숙자나 구걸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정말로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는게 확실하다. 이때도 들어올릴 필요는 없고 조금 우회해서 지나가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아파트 1층이 슈퍼인지라 늘 누군가 종이컵을 들고 앉아있는데, 이 때문에 산책에서 돌아올 때 차분하게 기분 좋게 돌아올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겁이 나서 흥분한 상태로 집에 쫓기듯 들어오게 되면 개는 산책을 좋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아파트 문 앞에서 보리를 앉혀놓고 좀 기다리게 해서 진정을 시키고 나서 집에 들어오는 식으로 뭔가 대안을 찾고 있다. 보리 키에는 조금 높다 싶은 계단도 엄청 잘 올라온다. 스프링으로 퉁기듯이 아주 경쾌하게 온 몸으로 ㅋㅋ계단을 오르는데 어찌나 이쁜지 궁딩이를 퐝퐝 퐝퐈오파퐝 때려주고 싶다.

주말에는 출근 인파가 없기 때문에 알람을 안 하고 그냥 맘대로 일어나는데 오늘은 8시 조금 안된 시각에 눈이 떠졌다. 바로 채비를 하고 보리와 함께 나가서 15분 정도 늘 가던 길로 산책을 하고, 같이 장을 보러 avenue de saxe로 향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박스나 행거들을 옮기는 상인들이 많아 보리가 조금 주춤했지만 그래도 내가 가는 대로 곧잘 따라왔다. 유기농 과일,야채상에서 멈추어 감자랑 바나나, 홍시를 샀고 그 반대편에 있는 커피집에서 아빠를 위한 디카페인 원두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시장길을 따라 내려가 늘 가는 사과/배 전문점 ㅋㅋ에서 내가 좋아하는 buckeye 사과 네개를 구입. (지금까지 왜 bucklee라고 알고 있었을까.) 다음 화요일 런던가는 날까지 매일 하나씩 먹을 요량으로. 이렇게 세번을 멈추는 동안 보리는 내 발치에 얌전히 잘 있었다. 옆에 누가 와서 서면 누군지 보느라 조금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나서 역시 늘 가는 동네 빵집에 가서 크로아상 하나를 샀다.

어제 오후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백설기 몇 덩어리와 유자차를 들고 문화원에 찾아갔다. 물론 보리도 함께다. 가는 길에는 보리를 새로 장만한 펀들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탔고, trocadero 역에서 내려서 부터는 줄곧 보리를 걷게 했다. 문화원서부터 집까지는 물론 걸어왔는데, 보리는 그 사람 많은 이에나 다리와 에펠탑 앞을 한번도 멈추지 않고 씩씩하게 잘 따라왔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사람들이 무서워 꿈쩍하지 않는 보리를 내가 안고서 지나가야만 했었는데, 정말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 니콜라에 들러 3리터짜리 chinon bag-in-box 와인을 샀는데 여기서도 보리를 가방에 쏙 집어 넣으니까 ㅋㅋ 편했다. 거기서부터 집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 동안 어딘가 분명 문제가 있는 개 한마리가 보리를 느닷없이 공격하는 바람에 몹시 당황했지만, 보리는 "쟤 뭐야..." 하는 정도 반응이었고 오히려 나만 패닉했다. 그렇게 담담해 보였던 보리가 집에 와서는 토를 하더니 이내 축 늘어져 곯아 떨어지는데, 아마도 속으로는 꽤나 놀랐었나보다. 너무나도 짠했다.

보리랑 나는 어느덧 제일 좋은 친구가 된 것 같다. 원하면 이젠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더욱 든든하다. 내가 공부할 때나 책을 읽을 때는 절대로 놀아달라고 보채거나 방해하지 않고, 내가 자면 같이 자고,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고, 나갈 땐 같이 나가고, 내 삶에 어느샌가 깊숙이 자리잡은 이 어리고 조그마한 생명이 한없이 사랑스럽고 기특하다. 보리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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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와 산책하는 것에 제법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꼭 해야한다는 부담감 내지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보리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일요일인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처럼 주변 상점들도 조용할 것이고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도, 시끄럽게 킥보드나 롤러브레이드 타는 초딩들도 없으니 둘이 걷기엔 딱 좋을 것 같았다.

avenue de suffren과 avenue de segur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보리는 빙빙 돌거나 네발로 완강하게 버티며 15분 동안이나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이럴 때는 보리가 특히 정말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길을 피해 살짝 돌아서 가면 결국 내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된다. 개는 참 알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또 참 단순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리랑 둘이서 꽤 진지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다보면 대체 내가 지금 뭐하는 건지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는 invalides 였는데 가는 도중에 소나기가 마구 쏟아져 근처 열려있는 까페 테라스로 무조건 피신했다. 어제 보리 목욕시켰는데 ㅠㅠ흑흑...

잠시 앉아 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보리가 계속 헥헥거리고 있길래 물을 주려고 종업원에게 혹시 종이컵 같은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참을 안 오길래 까먹었나 했는데, 웬걸 커다란 플라스틱 통? 에 물을 가득 담고 빨대 두개에 레몬 슬라이스까지 끼워서 대령하는 것이 아닌가. 보리를 위한 칵테일이라며.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정말 파리 사람들이 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이런 살아있는 애교와 위트.
보리는 애초에 별로 목이 말랐던 게 아니었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즐거웠다.
나중에는 웨이터에다가 매니저까지 나와서, 강아지가 칵테일 잘 마시나요? 빨대로 마시나요?? 하고 자꾸 물어보는데 보리는 빨대는 고사하고 ㅋㅋ 물도 거의 안 마셔서 좀 미안했다.
비가 심해지고 테라스 천막 안 테이블까지 영향권에 들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들 모두가 강아지를 좋아해서 무척 친절하게 보리를 맞아 주었다. 옆자리 혼자 오신 할머니는 연신 보리에게 뽀뽀를 날리시며 당신이 옛날에 키우셨다는 저먼 포인터들 이야기를 두런두런 해주셨는데 사실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안에 들어오자 보리는 특제 칵테일을 조금 마셨다.


그래서 결국 parc des invalides 에 도착했다. 꽃이랑 정원수를 너무 예쁘게 가꿔 놓았길래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걸음을 신나게 재촉했는데 개는 출입할 수 없단다. 김빠져서 그 앞 난간에 보리랑 둘이 걸터 앉아 시간을 좀 보냈다. 집념어린 셀카도 찍었다.



그렇게 앵발리드를 뒤로 하고 집에 오니 이미 3시간이 흘러 있었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보리도 좀 쉬게 하고, 저녁밥도 주었다.

아직 해가 좀 남았길래 8시 반쯤 보리랑 다시 산책을 나갔다.



묘한 푸른색이 층층이 어우러진 하늘과 에펠탑과 선선한 바람과 (사실 좀 추웠다) 나뭇잎 바삭이는 소리, 정말 좋았다. 집 앞에서 보리가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아서 좀 실랑이를 했다.



유네스코 담벼락에는 늘 세계 이곳 저곳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리랑 산책하면서 이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또 쏠쏠하다. 또 보고 또 보고...


오늘은 처음으로 보리가 아파트 건물 계단을 자기 힘으로 오르내리는 법을 배운 날이고
처음으로 산책나가서 응가를 한 날이다. ㅋㅋ이런 것 하나도 너무 기쁘다.

너무 많이 걷고 뛰어서인지 보리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렸다.
음... 이러다 몸살 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된다.
가서 한번 쓰다듬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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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넘게 함께 계셔주시던 아빠가 아침에 런던으로 떠나셨으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보리와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둘이서 말이다.
아빠를 북역까지 바래다 드렸는데 다른 때와는 달리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보통 때는 아빠가 떠나면 괜시리 집에 가지 않고 거리로 겉돌거나 집에 가더라도 느릿느릿 버스를 탔다 걸었다 꾀를 부렸었는데 오늘은 그런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집에 혼자 있을 보리를 생각하면 입맛도 딱 떨어지고 바깥 풍경도 재미가 없었다. 지하철에서 시간 때우려고 펴든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계단도 성큼 성큼 두개씩 오른다.

그렇게 해서 집에 도착했더니 보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지하게 흥분해서 나를 반긴다. 아마도 아침에 아빠가 커다란 짐을 다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서는 모습이 자기가 보기에도 수상하게 느껴졌던게 아닐까. 아니면 아빠가 잠든 보리를 쓰다듬으며 이런 저런 부탁인지 다짐인지 두런두런 말을 건네던 것이 미리 하는 작별 인사였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지. 자꾸 의인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보리가 날 반기는 모양이 다른 때완 달라서 자꾸만 끼워 맞추려 상상을 하게 된다. 안그래도 오늘부터는 든든한 아빠가 없고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보리가 문 앞에서 이렇게 날뛰며 좋아하니 어쩐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내가 없을 때 혹시 애태우고 힘들어하면 어쩌나, 내가 있어도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기라도 하면 어쩌나, 안그래도 걱정이 많은 내 성격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겨우 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하는 것 같더니 돌아 앉은 내 등을 향해 보리가 깽!! 하고 짖었다. 세상에....... 보리가 날 보고 짖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같이 지난 기간이 얼마 되지 않고 앞으로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침착하고 순하던 보리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그렇게 큰 소리를 냈다는 것은 "첫날"인 오늘 겪기에는 좋지 않은 징조 같아 보였다. 아빠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나마 꽤 긴장을 했었나보다. 스트레스를 풀어주겠다고 보리를 일단 줄에 매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 같다. 밖에 나갔더니 길거리엔 웬 공사가 시끄럽게 한창이었고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보리가 오들오들 떠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내가 먼저 보리에게 든든하고 믿음직한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냥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피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을 깨닫고 바로 보리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풀어주었더니, 보리는 금세 조용해졌다.

그 틈에 좀 씻고 정리도 하고 하다가 보리가 꾸벅꾸벅 졸기에 슈퍼에 가서 장을 봐왔다.
바보같이 서두르다가 보리 주려구 샀던 gruyere 한 토막 (비싼건데 ㅠ)을 계산대에 그대로 놓고 와버렸다.
어쨌든 3-40분 만에 집에 도착하니 보리는 잠을 자다가 집에서 쭈뼛쭈뼛 걸어나와 나를 반겼다. 아까 오전에 그랬던 것 보다는 훨씬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에 불안해하고 안심하고 이러면 좋을 것 하나도 없고 너무 피곤하기만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첫날이니 그렇고 점점 나아질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했다.

보리는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가 다 되도록 잠만 잤다. 8시에는 친구가 집 앞으로 와서 같이 보리를 데리고 나가 20분 정도 산책을 했다. 기특하게도 내 옆에서 의젓하게 잘 걸어주었고 며칠 전보다 차소리나 자전거, 오토바이 등의 소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아 너무 이뻤다. 건널목에서 중간에 한번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어느새 빨간불이 들어와 한번은 보리를 안고 건넜다. 그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집채만한 시커먼 왕개가 산책하고 있는 것을 마주쳤는데 보리는 역시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어제는 샹드막스에서 좀 이상하게 큰 잭러셀테리어 한마리가 보리한테 마구 뛰어오길래 나도 모르게 보리를 품에 안고 피했는데, 내가 너무 겁이 많아 오히려 용감한 보리를 잘못 키울 뻔 했다.

오늘은 아파트 현관의 커다란 쇠문도 크게 무서워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서 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대로 못했는데. 너무 이쁘다. 무사히 집에 들어와 발을 물로 닦아줬더니 정말 쌔까맣다 ㅋㅋ 아이고. 귀 청소 해주려고 했는데 보리 너무 겁먹어서 한쪽 귀 밖에 못했다....ㅋㅋ

일찍 자고 내일부턴 아침 일찍, 그리고 해 질때 쯤 밤에 이렇게 두번 딱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집 앞에 유치원이 있어서 낮에는 아이들이 시끄러워 보리가 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음. 이것도 내 과한 걱정이려나.

아빠랑 셋이 있을 때는 늘 아빠랑 내가 둘다 보이는 자기 크레이트 앞에서 잠을 자거나 놀거나 하더니, 내가 이제 혼자서 내 책상 앞에만 앉아있으니 줄곧 내 등 뒤에만 있는다. 가족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항상 보고 싶은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또 안쓰러워 맘이 무거워진다. 그러지 말아야지. 보리와 함께 사는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큰 공부이고 숙제인 것 같다. 보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바라고, 채근하기 보다 내 스스로가 조금 더 당당하고 용기있고 중심 잡힌 사람이어야 앞으로 둘의 생활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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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애견도감에 나오는 이름들을 a부터 z까지 줄줄 외고 다니던 나에게조차도 생소한 견종이다. 보더 테리어.

(까트린느 할머니가 사랑으로 키우시는 보더 테리어들 디디와 에로스.)

스코틀랜드 - 잉글랜드의 경계 지역에 있는 Borders라는 지방에서 유래한 견종으로 비교적 최근에야 정식 breed로 인정 받았다. 베들링턴 테리어, 레이크랜드테리어 등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영리하고 호기심도 많으며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력을 가진 개라고 한다. 몇 시간이고 말을 쫓아 달릴 수 있으며 어질리티, obéissance rythmée (리듬 복종 훈련?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온순하고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잘 따르지만 자기 기분을 확실히 표현할 줄 알고 고집도 꽤 세다.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을 따르자면 늘 명랑하고 애교가 많아 주인을 즐겁게 해주는 훌륭한 가정견이다. 이유없이 짖어대지 않으며 털도 잘 빠지지 않는데다 무척 튼튼해서 마음 걱정도 많이 시키지 않는단다.
어깨의 높이는 3-40cm 정도 되고 작은 머리에 다리가 길고 탄탄한 몸을 하고 있다. 수컷의 경우 6-8킬로그램, 암컷은 5-7 킬로그램 정도가 보통이다. 보통 미니어처 슈나우저나 푸들 정도의 몸집이고 (다리가 훨씬 길어 어깨가 좀 높은 것 같다) 비글, 코카 보다는 약간 작은 느낌이다.

직접 농장에 찾아가서 만나보니 듣던 대로 굉장히 활기차고, 잘 뛰고, 잘 놀고, 사람을 반가워 하고 무척 잘 따르는 호감형 멍멍이들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귀찮게 앵앵대거나 (나야 낯설어서 그렇다 쳐도, 주인에게도)
긍매거나 ㅋㅋ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다. 신나게 꼬리치며 왕왕 뛰어와서 반기지만 곧 자기 할일을 하고 논다. 그러다가도 주인이 자기에게 조금 관심을 보이면 금세 알아채고 달려와 또 재롱을 부린다. 우리가 딸기 타르트를 먹기 시작하자 테이블 쪽으로 막 달려와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다가도, 한번 안된다 소리를 듣자 더이상 매달리지 않고 테이블 아래에 얌전히 엎드려있다.
안아주면 안기고, 놓아주면 혼자 놀고, 꽤 쿨한 면이 있어 매력적이다.
굉장히 잘 뛰고 속도도 무지하게 빠르다.

* * *

혼자 늘 지내다 보니 집에 있을 때 좀 외롭기도 하고 약간 애정결핍 내지는 가벼운 우울증 증상까지 있는 것 같아 진지하게 걱정해온지도 꽤 되었는데 왜 지금까지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강아지를 키우기로 어느 날 뜻을 굳히고서 인터넷에서 내게 맞는 강아지 품종 찾기 테스트를 했더니, 베들링턴 테리어, 보더 테리어, 페루의 털 없는...개...(chien nu de Pérou, 한국말로 뭔지 모르겠다), 댄디딘몬트 테리어, 필드스패니얼, 노포크/노리치 테리어, 오스트리안 핀셔(단모종), 뉴스코틀랜드 리트리버, 노보튼 스피츠, 위시고트 스피츠...라는 결과를 얻었다.
나는 원래 테리어 종류를 굉장히 좋아한다. 스패니얼이나 핀셔는 생김새 면에서 많이 끌리지 않았고 리트리버, 스피츠는 너무 컸다. 페루의 털 없는 개...는 미끈하고 예쁘지만 너무 생소한 종류라 일단 스킵했다.
테리어는 다 좋아하는데도, 그 중 이상하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더 테리어였다. (http://wamiz.com/chiens/border-terrier-55)

당장 구글에서 프랑스 보더 테리어 포럼을 찾았고 종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 키우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들을 접하고 나니까 정말 딱 나한테 맞을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 들어갈 때 데리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무겁고 큰 개는 안된다.
아파트라 많이 짖어도 안되고 털도 많이 날리면 곤란하다.
나랑 아침 저녁으로 산책 매일 해야 하니까 털도 길어서 끌리면 안되고. (잘라 주면 된다지만)
귀엽고 말 잘듣고 잔병치레도 거의 없고... 더할 나위가 없었다.

브리더들이 분양하는 강아지들의 값은 900유로 선에서 대개 시작한다.
140-150만원 돈이다. 거기다 초반에 구입해야 하는 강아지 용품들, 밥값, 왔다갔다 교통비 등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이 될 것 같아 그냥 혈통은 없어도 건강한 강아지를 입양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그렇게 강아지 생각만 한지 4일 정도 지나 보더 테리어 포럼에 들어가 보니, 분양 게시판에 사진 한 장 없는 건조한 어투의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사연을 다 쓰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어떤 할머니 브리더 분께서 그동안 키워왔던 보더 테리어 성견들을 입양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메일을 보내 아주 솔직하게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건들, 강아지가 필요한 이유 등을 밝히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자, 또 4일 후,
마침 내게 알맞을 듯한 작은 암컷 한마리가 있다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해서 지난 주 처음으로 보리를 만났다. 물론 보자마자 푹 빠져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친구 보더 테리어들과 달리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반기지도 않고 다른 강아지와 엉겨붙어 싸우지도 않는다. 할머니네 보더 테리어들 중에서도 아주 독립적인 성격의 강아지라고 하셨다.
보리가 좋아하는 일은 철조망 너머 있는 할머니네 말들을 구경하는 것. 다른 강아지들을 앞장서 이끌고 말들을 괴롭히러 간다 ㅋ 물론 말들은 꿈쩍하지 않지만.
보리 어딨나 하고 찾아보면 철조망에 앞발을 놓고 서서 말들을 보면서 멍멍 짖고 있거나 할머니네 구형 벤츠 아래 그늘에 기어 들어가 혼자서 주위를 관찰하고 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서 예뻐해주려고 다가가면 낯을 무척 가리면서, 미안한 얼굴인지, 당혹스러운 표정인지 귀를 젖히고 꼬리를 살살 치면서 도망간다. 넓은 정원에서 사람 손 타지 않고 맘껏 뛰놀면서 자라, 이렇게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마도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내가 덥석 품에 안으니까 확 긴장해서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던 보리가 조금 안되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쫓아다녀서 스트레스 준 것 같아 미안하다. 에고 자꾸 생각난다.
아마도 나와 파리에서 둘이 살아가는데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먼저 와서 비벼대지 않아서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신경이 쓰였다.

샤르트르 가는 기차 안에서 아빠가 잠시 생각하시고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곡식 보리를 뜻하기도 하고, 불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고. 깨달음...
인터넷에 올라온 강아지 글들을 보다보면 보리라는 이름이 굉장히 많아서 처음엔 좀 망설였는데
생각할 수록 그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마음에 쏙 든다.
보더 테리어 할머니 까트린느도 보리의 뜻을 아시곤 인상적이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랄 강아지라 알파벳을 어떻게 하느냐가 또 관건이었는데
Borie 로 하기로 했다. 여자아이라서 끝에 e를 붙였다.
프랑스에는 Borie 라는 성도 있지만 단어도 있다. 마른 돌로 지은 시골집 같은 것을 일컫는 자주 쓰이지는 않는 단어다. 그 뜻도 마음에 든다.

아. 보리 앓이를 하느라 도무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29장의 보리 사진이 내 컴퓨터 바탕 화면과 스크린세이버로 랜덤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고 핸드폰과 아이패드 배경화면도 전부 보리. 설거지하면서도 보리 사진 보고 공부하다가도 보리 사진 본다.
8월 말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보리야 그 때까지 건강하게 밥 잘먹고 할머니 속 썩이지 말고 잘  있어야돼! 언니가 아빠랑 빨리 데릴러 갈께 ㅠ 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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