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애견도감에 나오는 이름들을 a부터 z까지 줄줄 외고 다니던 나에게조차도 생소한 견종이다. 보더 테리어.

(까트린느 할머니가 사랑으로 키우시는 보더 테리어들 디디와 에로스.)

스코틀랜드 - 잉글랜드의 경계 지역에 있는 Borders라는 지방에서 유래한 견종으로 비교적 최근에야 정식 breed로 인정 받았다. 베들링턴 테리어, 레이크랜드테리어 등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영리하고 호기심도 많으며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력을 가진 개라고 한다. 몇 시간이고 말을 쫓아 달릴 수 있으며 어질리티, obéissance rythmée (리듬 복종 훈련?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온순하고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잘 따르지만 자기 기분을 확실히 표현할 줄 알고 고집도 꽤 세다.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을 따르자면 늘 명랑하고 애교가 많아 주인을 즐겁게 해주는 훌륭한 가정견이다. 이유없이 짖어대지 않으며 털도 잘 빠지지 않는데다 무척 튼튼해서 마음 걱정도 많이 시키지 않는단다.
어깨의 높이는 3-40cm 정도 되고 작은 머리에 다리가 길고 탄탄한 몸을 하고 있다. 수컷의 경우 6-8킬로그램, 암컷은 5-7 킬로그램 정도가 보통이다. 보통 미니어처 슈나우저나 푸들 정도의 몸집이고 (다리가 훨씬 길어 어깨가 좀 높은 것 같다) 비글, 코카 보다는 약간 작은 느낌이다.

직접 농장에 찾아가서 만나보니 듣던 대로 굉장히 활기차고, 잘 뛰고, 잘 놀고, 사람을 반가워 하고 무척 잘 따르는 호감형 멍멍이들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귀찮게 앵앵대거나 (나야 낯설어서 그렇다 쳐도, 주인에게도)
긍매거나 ㅋㅋ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다. 신나게 꼬리치며 왕왕 뛰어와서 반기지만 곧 자기 할일을 하고 논다. 그러다가도 주인이 자기에게 조금 관심을 보이면 금세 알아채고 달려와 또 재롱을 부린다. 우리가 딸기 타르트를 먹기 시작하자 테이블 쪽으로 막 달려와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다가도, 한번 안된다 소리를 듣자 더이상 매달리지 않고 테이블 아래에 얌전히 엎드려있다.
안아주면 안기고, 놓아주면 혼자 놀고, 꽤 쿨한 면이 있어 매력적이다.
굉장히 잘 뛰고 속도도 무지하게 빠르다.

* * *

혼자 늘 지내다 보니 집에 있을 때 좀 외롭기도 하고 약간 애정결핍 내지는 가벼운 우울증 증상까지 있는 것 같아 진지하게 걱정해온지도 꽤 되었는데 왜 지금까지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강아지를 키우기로 어느 날 뜻을 굳히고서 인터넷에서 내게 맞는 강아지 품종 찾기 테스트를 했더니, 베들링턴 테리어, 보더 테리어, 페루의 털 없는...개...(chien nu de Pérou, 한국말로 뭔지 모르겠다), 댄디딘몬트 테리어, 필드스패니얼, 노포크/노리치 테리어, 오스트리안 핀셔(단모종), 뉴스코틀랜드 리트리버, 노보튼 스피츠, 위시고트 스피츠...라는 결과를 얻었다.
나는 원래 테리어 종류를 굉장히 좋아한다. 스패니얼이나 핀셔는 생김새 면에서 많이 끌리지 않았고 리트리버, 스피츠는 너무 컸다. 페루의 털 없는 개...는 미끈하고 예쁘지만 너무 생소한 종류라 일단 스킵했다.
테리어는 다 좋아하는데도, 그 중 이상하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더 테리어였다. (http://wamiz.com/chiens/border-terrier-55)

당장 구글에서 프랑스 보더 테리어 포럼을 찾았고 종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 키우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들을 접하고 나니까 정말 딱 나한테 맞을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 들어갈 때 데리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무겁고 큰 개는 안된다.
아파트라 많이 짖어도 안되고 털도 많이 날리면 곤란하다.
나랑 아침 저녁으로 산책 매일 해야 하니까 털도 길어서 끌리면 안되고. (잘라 주면 된다지만)
귀엽고 말 잘듣고 잔병치레도 거의 없고... 더할 나위가 없었다.

브리더들이 분양하는 강아지들의 값은 900유로 선에서 대개 시작한다.
140-150만원 돈이다. 거기다 초반에 구입해야 하는 강아지 용품들, 밥값, 왔다갔다 교통비 등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이 될 것 같아 그냥 혈통은 없어도 건강한 강아지를 입양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그렇게 강아지 생각만 한지 4일 정도 지나 보더 테리어 포럼에 들어가 보니, 분양 게시판에 사진 한 장 없는 건조한 어투의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사연을 다 쓰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어떤 할머니 브리더 분께서 그동안 키워왔던 보더 테리어 성견들을 입양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메일을 보내 아주 솔직하게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건들, 강아지가 필요한 이유 등을 밝히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자, 또 4일 후,
마침 내게 알맞을 듯한 작은 암컷 한마리가 있다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해서 지난 주 처음으로 보리를 만났다. 물론 보자마자 푹 빠져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친구 보더 테리어들과 달리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반기지도 않고 다른 강아지와 엉겨붙어 싸우지도 않는다. 할머니네 보더 테리어들 중에서도 아주 독립적인 성격의 강아지라고 하셨다.
보리가 좋아하는 일은 철조망 너머 있는 할머니네 말들을 구경하는 것. 다른 강아지들을 앞장서 이끌고 말들을 괴롭히러 간다 ㅋ 물론 말들은 꿈쩍하지 않지만.
보리 어딨나 하고 찾아보면 철조망에 앞발을 놓고 서서 말들을 보면서 멍멍 짖고 있거나 할머니네 구형 벤츠 아래 그늘에 기어 들어가 혼자서 주위를 관찰하고 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서 예뻐해주려고 다가가면 낯을 무척 가리면서, 미안한 얼굴인지, 당혹스러운 표정인지 귀를 젖히고 꼬리를 살살 치면서 도망간다. 넓은 정원에서 사람 손 타지 않고 맘껏 뛰놀면서 자라, 이렇게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마도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내가 덥석 품에 안으니까 확 긴장해서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던 보리가 조금 안되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쫓아다녀서 스트레스 준 것 같아 미안하다. 에고 자꾸 생각난다.
아마도 나와 파리에서 둘이 살아가는데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먼저 와서 비벼대지 않아서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신경이 쓰였다.

샤르트르 가는 기차 안에서 아빠가 잠시 생각하시고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곡식 보리를 뜻하기도 하고, 불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고. 깨달음...
인터넷에 올라온 강아지 글들을 보다보면 보리라는 이름이 굉장히 많아서 처음엔 좀 망설였는데
생각할 수록 그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마음에 쏙 든다.
보더 테리어 할머니 까트린느도 보리의 뜻을 아시곤 인상적이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랄 강아지라 알파벳을 어떻게 하느냐가 또 관건이었는데
Borie 로 하기로 했다. 여자아이라서 끝에 e를 붙였다.
프랑스에는 Borie 라는 성도 있지만 단어도 있다. 마른 돌로 지은 시골집 같은 것을 일컫는 자주 쓰이지는 않는 단어다. 그 뜻도 마음에 든다.

아. 보리 앓이를 하느라 도무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29장의 보리 사진이 내 컴퓨터 바탕 화면과 스크린세이버로 랜덤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고 핸드폰과 아이패드 배경화면도 전부 보리. 설거지하면서도 보리 사진 보고 공부하다가도 보리 사진 본다.
8월 말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보리야 그 때까지 건강하게 밥 잘먹고 할머니 속 썩이지 말고 잘  있어야돼! 언니가 아빠랑 빨리 데릴러 갈께 ㅠ 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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