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와 산책하는 것에 제법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꼭 해야한다는 부담감 내지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보리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일요일인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처럼 주변 상점들도 조용할 것이고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도, 시끄럽게 킥보드나 롤러브레이드 타는 초딩들도 없으니 둘이 걷기엔 딱 좋을 것 같았다.

avenue de suffren과 avenue de segur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보리는 빙빙 돌거나 네발로 완강하게 버티며 15분 동안이나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이럴 때는 보리가 특히 정말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길을 피해 살짝 돌아서 가면 결국 내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된다. 개는 참 알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또 참 단순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리랑 둘이서 꽤 진지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다보면 대체 내가 지금 뭐하는 건지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는 invalides 였는데 가는 도중에 소나기가 마구 쏟아져 근처 열려있는 까페 테라스로 무조건 피신했다. 어제 보리 목욕시켰는데 ㅠㅠ흑흑...

잠시 앉아 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보리가 계속 헥헥거리고 있길래 물을 주려고 종업원에게 혹시 종이컵 같은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참을 안 오길래 까먹었나 했는데, 웬걸 커다란 플라스틱 통? 에 물을 가득 담고 빨대 두개에 레몬 슬라이스까지 끼워서 대령하는 것이 아닌가. 보리를 위한 칵테일이라며.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정말 파리 사람들이 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이런 살아있는 애교와 위트.
보리는 애초에 별로 목이 말랐던 게 아니었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즐거웠다.
나중에는 웨이터에다가 매니저까지 나와서, 강아지가 칵테일 잘 마시나요? 빨대로 마시나요?? 하고 자꾸 물어보는데 보리는 빨대는 고사하고 ㅋㅋ 물도 거의 안 마셔서 좀 미안했다.
비가 심해지고 테라스 천막 안 테이블까지 영향권에 들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들 모두가 강아지를 좋아해서 무척 친절하게 보리를 맞아 주었다. 옆자리 혼자 오신 할머니는 연신 보리에게 뽀뽀를 날리시며 당신이 옛날에 키우셨다는 저먼 포인터들 이야기를 두런두런 해주셨는데 사실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안에 들어오자 보리는 특제 칵테일을 조금 마셨다.


그래서 결국 parc des invalides 에 도착했다. 꽃이랑 정원수를 너무 예쁘게 가꿔 놓았길래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걸음을 신나게 재촉했는데 개는 출입할 수 없단다. 김빠져서 그 앞 난간에 보리랑 둘이 걸터 앉아 시간을 좀 보냈다. 집념어린 셀카도 찍었다.



그렇게 앵발리드를 뒤로 하고 집에 오니 이미 3시간이 흘러 있었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보리도 좀 쉬게 하고, 저녁밥도 주었다.

아직 해가 좀 남았길래 8시 반쯤 보리랑 다시 산책을 나갔다.



묘한 푸른색이 층층이 어우러진 하늘과 에펠탑과 선선한 바람과 (사실 좀 추웠다) 나뭇잎 바삭이는 소리, 정말 좋았다. 집 앞에서 보리가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아서 좀 실랑이를 했다.



유네스코 담벼락에는 늘 세계 이곳 저곳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리랑 산책하면서 이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또 쏠쏠하다. 또 보고 또 보고...


오늘은 처음으로 보리가 아파트 건물 계단을 자기 힘으로 오르내리는 법을 배운 날이고
처음으로 산책나가서 응가를 한 날이다. ㅋㅋ이런 것 하나도 너무 기쁘다.

너무 많이 걷고 뛰어서인지 보리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렸다.
음... 이러다 몸살 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된다.
가서 한번 쓰다듬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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