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상을 떠난 두 해군장병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들분께도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공연 감상문을 쓰기를 좀 망설였지만 그래도 목표한 바가 있으니.
팔자 좋은 유학생이라 이런 때 가족들 두고 멀리 타국에 있지만 정말 내내 마음이 편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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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하루에도 몇번이나 생각하고 심장이 쿵쿵 뛸만큼 기대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비엔나 필하모닉의 베토벤 사이클 첫 공연날이었다.
오래전 예매를 하긴 했지만 학생 표라 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J열 가운데열 통로쪽 자리를 주었다. 비록 간이의자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너무나도 당연히 관객들은 온 극장 안에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운좋게도 내 바로 뒷 줄에서만 두자리가 비어서 같은 학생표 출신인 어린 남학생과 잽싸게 이동, 제대로 된 좌석에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바로 뒷자리에 또 에셴바흐 할아버지가... ㅋㅋㅋ
지난 번과 예르비 공연 때 같이 정렬의 빨간색 스카프를 하고 오셨다.
에셴바흐 선생님과 같은 공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괜히 나까지 뭔가 음악인이 된 것 같았다. 우쭐하며 고개를 돌리니 막상 나와 모의하여 자리를 옮긴 꼬꼬마 학생은 오선노트를 꺼내서 숙제인지 뭔지 작곡을 하던데... 나는 급 쭈그러짐.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1부에는 에셴바흐 선생님의 강렬한 코롱 향이 진동해서 좀 힘들었다.
1부의 교향곡 4번이 끝나자 그는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가 떠나자 2부 중에는 계속 호박 물고구마 삶는 냄새가...... 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왜 고구마 삶는 냄새가 났던 걸까.
아직도 그 냄새가 코 끝에 선명히 남아있다. 뭐지 진짜. 누가 고구마 향수를...

어쨌든 오늘의 연주는 베토벤 교향곡 4번과 5번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어본 교향곡은 3, 5, 6, 7, 9번 밖에 없다. 이렇게 계속 편식을 해왔기 때문에 전곡 연주 싸이클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뭔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4번은 내가 들어본 베토벤 교향곡 중에 제일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대충 썼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건 알 수 없고, 쉽게 귀에 와 닿는 곡이었다.

사실 모르는 곡을 들으면 연주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난생 처음 듣는 (하긴 근 2-3년 안에 들은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 실황이 난생 처음이었지) 비엔나 필하모닉 공연에는 객석에건 무대에건 예상대로 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래서 사실 더 긴장하고 더 압도당했는지도 모른다. 1부가 끝나고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강력하다는 것 뿐이다.
"합주"라는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마치 내가 작년에 에릭 봉파르 피겨 보러갔을 때 - 선수들이 다들 잘하길래 어..잘하는구나 했는데 마지막에 김연아 선수가 나오니까 아...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던 경험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정도 충격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압도적이었다.

늘 연주 외의 부수적인 것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은 나는 또 틸레만의 지휘가 너무 신기했다.
얼굴은 엄청난 동안인데 - 그것도 전형적인 독일인의 얼굴 ..!!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차남 Kurt를 닮았다. - 족히 190 cm는 되어보이는 키다리에 거의 10등신. 게다가 너무 예쁜 외투를 입고 지휘했다. 등의 주름이 독특하던데. 아무튼 뭔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귀여움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머릿결이 정말 굉장히 좋고 그 비단결같은 머리를 신나게 흔들며 헤드뱅잉 하듯 지휘를 했다. 제1바이올린 부수석과 첼로 수석이 앉은 쪽을 향해 격정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확 굽혀 보면대에 머리를 부딪히는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 정말 쌔빨개지도록 열정적으로 지휘를 한다. 물론 다른 지휘자들이 얼굴이 상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덜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홍옥처럼 빠알간 얼굴은 (정말 사운드오브뮤직이다) 베토벤의 열기를 시각적으로까지 전달해주는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였다.

자리 원래 주인이 올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의자에 꼭 붙어 휴식시간을 보내고
대망의 5번.
4악장 듣고 또 울까봐 휴지도 주머니에 하나 넣어 놨다.
1악장 첫 과과과광- 을 듣고 내 머리속에는 그저 미쳤다... 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엔 이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잠시 후엔 대체 이런걸 어떻게 만든건가 하는 베토벤에 대한 찬탄과 경외심이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1악장이 주는 임팩트 만큼이나 살떨리는 연주였다. 이거 뭐 이러다간 4악장 까지 가기도 전에 눈물 콧물 다 나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훌륭했다. 넓고 깊고 풍성한 하모니와 정신 못차리게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바이올린이며 날카롭고 정확한 관악, 이미 관객들은 능동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입장이 아니라 음악에 의해 머리 한가운데를 관통당하고 있는 그런 무아의 지경이다.

어느 파트 하나 빼놓을 게 없었지만 제1바이올린과 관악 쪽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을 했다.
2악장에서도 ㅠ 정말 1악장에서 덜덜 떨다가 2악장으로 오니 갑자기 겨울밤에 귀가해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 딱 그 처음의 쩌릿한 느낌. 좋았다. 첼로와 비올라의 활약이 돋보였다. 첼로 파트만 혼자 나올 때의 그 위엄이란. 3악장도 몇몇 부분에서 합주가 정말 어마어마해서 입이 문자 그대로 쩍- 벌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어휴..

준비한 휴지를 꺼낼 일이 없었던 것은 사실 4악장에 이유가 있다. 틸레만의 4악장은 너무 빨랐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서 정말 제일 짧았던 것 같다.
정말 빠르고 패기가 넘치는 파격적인 연주였음에는 틀림 없으나 내가 원하는 4악장은 아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 환희와 괴로움과 격정을 마음 놓고 온 몸으로 흡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연주다.
숨가쁘게 달려와 가까스로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때서야, 지쳐서 바닥에 나뒹굴든 성취감에 흐느끼든 뒤를 돌아보든 할 수 있는 단거리 경주 같았다.
그 와중에도 오직 기가 막혔던 것은 그 가공할 속도를 그대로 쫓아가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모든걸 다 소화해 내는 1,2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들의 실력이다. 전부 현이 한두줄 씩 끊어져서 주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무리 숨가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두번째 주제 부분이라고 해야하나
대충 4악장 1분 쯤에 나오는 그 부분에선 약간 코끝이 시큰했다. 무서운 베토벤.....

아 ! 앵콜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곡인지 전혀 모른다  ^ ^
뭔가 오스트리아 독일 쪽 약간 19세기 말 20세기 느낌이 나는 중후한 곡이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다
+ 우와. 완전 틀렸군.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음악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내가 하루에 저렇게 80분 씩이라도 무언가에 완전히 몰두하는 일이 있던가?
나를 잊을 정도로 내 주변을 잊을 정도로 모든 감각을 다 통제하고 오직 한가지에 집중하는 시간이 하루에 몇분이나 되던가, 하는 물음.
저들에게 음악과 악기가 있듯이 나에게는 책과 글이 있는데.
하루에 최소한 80분이라도 저렇게 완전히 책 속에 빠져드는 때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읽기야 읽지. 이 말이 더 부끄럽다.

내일도 6번과 7번 공연이 있다.
오늘 5번을 듣고나니 무엇보다 7번이 몹시 기대된다.
내일 더 연구를 해보고 또 다른 발견을 해야지.

10유로 내고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는게 대단하다. 나도 자립해서 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의 나같은 학생들이 이런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정말 이렇게 좋은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게 좋은지 별론지 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마련해주고 싶다. 또 먼 훗날 포부 밝히네
일단 40분 집중 해보고 다시 말하자.....





내가 처음 앉았던 간이좌석에서 찍은 사진. 그래도 위치 정말 좋았다.
나와 같은 처지(였던) 학생이 앞에 보인다.



할아버지 얼굴이 빼꼼히 보이길래



마지막 커튼콜 때.
맨날 사진 찍고 촌스럽지만 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 같다.
틸레만 상기된 얼굴이 사진에도 보인다.


+ 같은 날 공연 리뷰가 concertonet.com 이라는 프랑스 사이트에 올라왔다.
필자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다. technically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이유가 있는 혹평이지만
그래도 5번 4악장 빼고는 난 여전히 좋았다는 생각이다.
http://www.concertonet.com/scripts/review.php?ID_review=6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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