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처럼 나도 마음잡고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읽고 싶은"이 아니라 정말 읽어야 만 할) 눈에 밟혀 며칠 전부터 제목만 써놓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 한 문장 안에만해도 스트레스를 생성하는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이를 다시 되뇌여보는 나의 마음은 황무지와 같다.

오늘 아침에도 조금 느지막히 산책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젯밤 너무 늦게 잠들기도 했고 토요일이라 출근 인파가 없어 좀 여유를 부린 탓도 있다. 어제 꽤 늦은 시간에 보리를 데리고 나갔었으니 한시간 쯤 늦어져도 괜찮겠지 싶었기도 하고. 보리는 내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후부터 부쩍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목걸이만 손에 들어도 나에게 마구 뛰어와 부비질 않나, 문을 여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질 않나, 별일이다. 그리고 부쩍, 우리 동네를 자기 동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예 모르는 곳이나 인파가 많은 곳에 가면 나만을 의지하며 멈추지 않고 바짝 따라 오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다니는 늘 같은 산책코스에서는 나름 주변을 "관리"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쪽 저쪽으로 겁없이 쏘다닌다. 함께 똑바로 걷는데 꽤 엄격한 나이지만 친근한 장소에서 친근한 다른 개들 흔적을 찾는 것 뿐인데 너무 빡빡하게 굴 것 있겠나 싶어 조금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 그래도 5-10분 정도는 꼭 내 발치에서 얌전히 걷게 하니 아마도 크게 잘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Quai Branly 박물관의 도서관 - 엄밀히 말하면 mediatheque - 이 그렇게 분위기도 괜찮고 좋다기에 계속 벼르다가 오늘 오전에 처음으로 한번 가 보았다. 원래 다니던 2구의 INHA 미술사도서관과 13구의 BNF가 내 전공 책들을 찾아보기에는 최고지만 가는 길이 멀어서 보리를 키우기 시작한 후로는 각각 다섯번도 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께 브렁리 박물관은 버스만 제시간에 와준다면 15분 내에 갈 수 있고, 여차하면 자전거로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 곳의 도서관이 괜찮다면 나한텐 정말 꽤 좋은 일이다. 11시나 되어야 열지만 저녁 8시까지는 열려있고 무료인 것도 큰 장점이다.
께 브렁리 박물관 안뜰의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늘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도 역시 보기 좋더군. 지금은 마오리족 문화 예술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에 갈 때 한번쯤 들러보아도 좋겠다. 께 브렁리 박물관은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제3세계" - 즉 이곳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비서구권 민족과 나라들의 문화 예술과 유물을 다루는 상당히 쿨한 곳으로, 예술과 인류학과 민족학과 역사학이 어우러진 상당히 쿨한 곳이다. 재작년에 재즈 음악 전시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요즘 나는 내 인생 덜렁이 시기의 최정점에 있기 때문에 역시나 준비물인 증명사진을 잊었지만 수염쟁이 아저씨는 집에 가서 직접 붙이라며 흔쾌히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쨌든 도서관은 환상적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아주 넓고 두꺼운 나무 책상과 적절한 조도, 전부 통유리로 세느강을 향해 확 트인 공간이 정말 최고였다. 연지 얼마 안 된 시간이어서 아직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사람도 거의 없어서 무척 조용했다. 책도 금방 찾아다 주었고.
앞으로 자주 가야겠다. 가까운 곳에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오랜만에 모노프리에 들러서 먹을 것들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보리가 없을 때는 모노프리에 일주일에 두세번은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근 3주 만에 처음 갔다.
다녀와서 보리를 데리고 다시 나가 얼마전 주문했던 보리 사료를 찾아가지고 왔다.
소포 안에서 벌써 사료 냄새가 나는지 엄청 킁킁대더라. 개는 개야.


글 쓰다말고 보리 잘 있나 보러 가서 엉겁결에 보리를 품에 안고 재웠다. 보리는 코골고 나도 그걸 듣고 있다보니 약간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1악장이 거의다 끝날 때 까지 안고 있었으니 꽤 오랫동안 한 자세로 보리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밖에서 소리가 나서 보리가 고개를 번쩍 들기에 소파에 얌전히 내려놓고 왔는데 왼팔과 허리가 무지 아프다 ㅋㅋ 윗 사진은 며칠전에 찍었던 거였는데 방금도 똑같은 옷에 비슷한 자세로 보리를 재웠다. 오늘은 다만 내 어깨 쪽에 머리를 기대고 자더라. 아이고 귀여워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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