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지금까지 살면서 몇번의 새학기를 맞이했던 걸까 생각하니 몸이 으드드 떨린다.
어쨌든 셀 수 없이 많았던 그 새학기, 또 하나를 맞았다.
그래도 이번 개강은 좀 각별하다.
그동안 나름 열정과 애정을 (공통분모는 "정".) 을 가지고 공부했던 중세미술사를 결국은 한켠에 밀어두고 새로운 교수님과 새로운 전공을 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일이 잘 풀리게 되어 참 다행이고 그래서 이 글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거지만, 여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돌아왔나,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 지난 날들이 후회스럽고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랬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다. 이제서라도 내게 기회가 주어지고, 일종의 고비를 넘었으니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심지어 훌륭하게) 앞으로는 지금 내가 절실하게 생각하는 이 모습대로, 지금의 마음으로, 잘. 해야할 것이다.
이번 여름을 지나오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의 행동에 대해, 말에 대해, 시간에 대해, 나아갈 길에 대해 더욱 깊고 진지하게, 보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제는 보리도 있으니 적어도 외로움과 자기연민에 헛되이 시간을 보낼 일은 없을 거다.
참으로 진부한 말이지만 나의 가장 큰 적은, 가장 큰 약점은 나 자신이었다.

박물관학과 박물관의 역사는 프랑스에 처음 유학오면서부터 꼭 하고싶었던 공부인데다 나를 지도해주기로 하신 교수님은 그 분야에서는, 그리고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이다. 더군다나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없이 모교에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다. 새학기, 새 선생님, 새친구들, 새 공책, 새 교재들인데 강의실들만 익숙하다.
벌써 두번의 수업을 들었는데 무척 기분이 좋다.
지도교수님의 수업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학술적 접근들) 은 정말 고작 몇단어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정말 너무 재미있고 학부 때와 석사 때 하던 것처럼 예습복습도 하고 필기도 하게 되어서 즐겁다.
열심히 해야지.

어제는 아빠랑 보리랑 Rambouillet 근처의 숲에 피크닉 겸 산책을 갔었는데
더웠지만 나무 그늘은 선선하고 저녁 공기는 청량하고 하늘은 푸르르고 참 좋았다.
그게 벌써 어제라니 새삼 아쉽다. 시간이 잘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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