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기 보다는 그냥 그동안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요즘 보리와의 산책은 더없이 즐겁다. 지난달 초에도 이미 재미가 붙었다고 썼었는데, 그때의 재미라는 것은 지금 내가 (우리가?) 느끼는 데 비하면 조금 안스러울 정도다. 대략 지난 1주일 전부터 보리는 나를 따라 어디든 간다. 여기서 오는 충만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산책을 나갈 때나 들어올 때, 버팅기는 보리를 번쩍 들고 옮길 필요가 더이상 없게 되었다. 어떤 문 앞에서든 보리는 스스로 앉아서 내가 문을 열고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두컴컴한 계단도 나를 따라 거침없이 내려온다.

이제는 킥보드나 롤러브레이드를 타는 애들도,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희한하게도 아직 커다란 아저씨들, 또는 노숙자나 구걸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정말로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는게 확실하다. 이때도 들어올릴 필요는 없고 조금 우회해서 지나가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아파트 1층이 슈퍼인지라 늘 누군가 종이컵을 들고 앉아있는데, 이 때문에 산책에서 돌아올 때 차분하게 기분 좋게 돌아올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겁이 나서 흥분한 상태로 집에 쫓기듯 들어오게 되면 개는 산책을 좋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아파트 문 앞에서 보리를 앉혀놓고 좀 기다리게 해서 진정을 시키고 나서 집에 들어오는 식으로 뭔가 대안을 찾고 있다. 보리 키에는 조금 높다 싶은 계단도 엄청 잘 올라온다. 스프링으로 퉁기듯이 아주 경쾌하게 온 몸으로 ㅋㅋ계단을 오르는데 어찌나 이쁜지 궁딩이를 퐝퐝 퐝퐈오파퐝 때려주고 싶다.

주말에는 출근 인파가 없기 때문에 알람을 안 하고 그냥 맘대로 일어나는데 오늘은 8시 조금 안된 시각에 눈이 떠졌다. 바로 채비를 하고 보리와 함께 나가서 15분 정도 늘 가던 길로 산책을 하고, 같이 장을 보러 avenue de saxe로 향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박스나 행거들을 옮기는 상인들이 많아 보리가 조금 주춤했지만 그래도 내가 가는 대로 곧잘 따라왔다. 유기농 과일,야채상에서 멈추어 감자랑 바나나, 홍시를 샀고 그 반대편에 있는 커피집에서 아빠를 위한 디카페인 원두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시장길을 따라 내려가 늘 가는 사과/배 전문점 ㅋㅋ에서 내가 좋아하는 buckeye 사과 네개를 구입. (지금까지 왜 bucklee라고 알고 있었을까.) 다음 화요일 런던가는 날까지 매일 하나씩 먹을 요량으로. 이렇게 세번을 멈추는 동안 보리는 내 발치에 얌전히 잘 있었다. 옆에 누가 와서 서면 누군지 보느라 조금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나서 역시 늘 가는 동네 빵집에 가서 크로아상 하나를 샀다.

어제 오후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백설기 몇 덩어리와 유자차를 들고 문화원에 찾아갔다. 물론 보리도 함께다. 가는 길에는 보리를 새로 장만한 펀들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탔고, trocadero 역에서 내려서 부터는 줄곧 보리를 걷게 했다. 문화원서부터 집까지는 물론 걸어왔는데, 보리는 그 사람 많은 이에나 다리와 에펠탑 앞을 한번도 멈추지 않고 씩씩하게 잘 따라왔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사람들이 무서워 꿈쩍하지 않는 보리를 내가 안고서 지나가야만 했었는데, 정말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 니콜라에 들러 3리터짜리 chinon bag-in-box 와인을 샀는데 여기서도 보리를 가방에 쏙 집어 넣으니까 ㅋㅋ 편했다. 거기서부터 집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 동안 어딘가 분명 문제가 있는 개 한마리가 보리를 느닷없이 공격하는 바람에 몹시 당황했지만, 보리는 "쟤 뭐야..." 하는 정도 반응이었고 오히려 나만 패닉했다. 그렇게 담담해 보였던 보리가 집에 와서는 토를 하더니 이내 축 늘어져 곯아 떨어지는데, 아마도 속으로는 꽤나 놀랐었나보다. 너무나도 짠했다.

보리랑 나는 어느덧 제일 좋은 친구가 된 것 같다. 원하면 이젠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더욱 든든하다. 내가 공부할 때나 책을 읽을 때는 절대로 놀아달라고 보채거나 방해하지 않고, 내가 자면 같이 자고,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고, 나갈 땐 같이 나가고, 내 삶에 어느샌가 깊숙이 자리잡은 이 어리고 조그마한 생명이 한없이 사랑스럽고 기특하다. 보리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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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샤이와 게반트하우스의 베토벤 사이클 첫번째 날이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2번과 5번, 그리고 가운데 Carlo Boccadoro의 Rittrato di musico (프랑스초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토벤의 2번 교향곡은 라디오에서 3악장을 다른 일 하면서 뒷배경으로 들은 이후로 처음으로 접한 것이었는데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곡 전체를 관통하는 음의 배열과 공식이 어떻게 변형되고 또 다시 제자리를 찾는 가를 관찰하는 일은 늘 즐겁다. 2, 3악장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보카도로의 리트라토 디 무지코 역시 인상깊게 들었다. 모래시계가 아래쪽으로 중심을 이동해가는 사라락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빛나는 해파리가 바닷속을 가르는 모양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쨌든 표제는 "음악가"의 초상이지만, 바삭하면서도 유연한 오묘한 곡이었다. 요즘 듣는 현대 음악들은 어쩐지 다 좋은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음...혹시 귀가 트이는 걸까? ㅋㅋ 써놓고도 웃기지만 어쨌든간 다행인 일이다.

5번은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좋았다. 나는 역시 샤이의 "멋"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의 지휘는 정말 멋이 있고 구조가 탄탄한데, 장인이 빚어내는 훌륭한 도자기같다. 이 도자기는 과한 장식은 없지만 볼 수록 안정감과 무게가 있어 아늑한 맛이 있고 빛깔은 그윽하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일순간 한낮의 빛이 가 닿으면 그 윤곽이 찬란히 빛난다. 삶의 짙은 내음이 깊숙이 파고 드는 5번 교향곡을 여기에 덧입히니 듣는 이는 감격할 뿐이다. (사실은 베토벤에 샤이를 덧입혔다 해야 맞겠지만.)
한달에도 몇번이고 음악을 들으러 가지만,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게 되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다녀오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은 했지만 벌써 1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마무리 할 수 있었는데. 아직도 다시 생각하면 얼떨떨하다. 오늘 저녁에는 8번과 3번 연주가 있다. 무척 기대된다. 이번엔 합창석 자리라 지휘자를 정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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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는 아이폰이랑 아이패드 ios 업데이트 하느라 ㅋㅋ 글을 못 쓰고 그냥 잠들었다.
처음으로 에두아르 투빈 (Eduard Tubin : 에스토니아 출신의 20세기 작곡가인데 정확한 발음은 모르겠다.) 의 음악을 접했다. 단악장으로 된, 아니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미완성으로 남은 교향곡이었는데 번호가 11번이라 놀랐다. 내가 몰랐던 작곡가라고 해서 그가 11편의 교향곡을 남겼다는 것이 놀라울 것은 없는데 말이다.
네메 예르비도 즐겨 연주하던 작곡가인 것 같다. 이날 들은 11번 교향곡이 무척 마음에 들어 아마존을 찾아보니 전집이 하나 있는데 네메 예르비의 것이었다. 무척 세련되고 힘있고 신선한 곡이었다.

내 앞 옆으로 삥 둘러 음악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쭉 앉았는데 콘서트마스터인 Roland Daugareil 가 들어오자 마치 아인트호벤 사람들이 위숭빠레 ㅋㅋ 했던 것 처럼 로올렁 로올렁 하고 이상한 딱다구리 같은 소리를 일제히 내서 너무 웃겼다. 아마도 도갸레이의 제자였거나 제자인 모양이다. 웃음을 참느라 조금 힘들었다.

지난 금요일부터 쓰려고 잡고 있던 글인데 몸살 때문에 결국 일요일인 오늘까지 와버렸다.
무슨 말을 쓰려고 했었는지 점점 흐릿해져간다. ㅠ
어쨌든 카바코스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내가 라이브로 들은 연주 중에 단연 최고였는데 (그리 많지야 않지만), 지난번 스베틀린 루세프도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정교함과 간결함, 콘트라스트가 그리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기승전결은 정말 거장의 그것이라 할 만 했다.
무대 바로 앞 두번째 줄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바이올린의 독주에 더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잘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매번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들을 수 있는 최고를 들었다는 실감이 확 났다. 정말 눈물을 글썽일 뻔 했던 것은 이번이 아니라 루세프 때였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런 벅찬 감동 때문에 울컥하는 일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몸과 마음으로 집중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들을 수 있었다.

2부에는 26세에 요절한 Hans Rott 라는 작곡가의 교향곡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연주 시간이 60분이라는 것을 보고 고민하다 그냥 귀가했다. 이 날 오전에도 수업이 있어서 보리를 네시간 가까이 집에 혼자 두었었는데 저녁에도 그렇게 오래 떠나있기가 영 마음에 걸려서였다. 조금 아쉬웠지만 대신 Tubin의 11번 교향곡을 알게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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