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서둘러 돌아와 바로 보리를 크레이트에서 꺼내주고, 물 한잔을 들이키고, 설거지를 하고,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집에 혼자 있을 보리가 안타까워 첫번째 커튼콜에 부리나케 집으로 내달렸는데 이녀석은 내가 와도 한 5초 동안 간략히 신나하다가 이내 자기 할 일 (= 소가죽 개껌 뜯기) 에 몰두한다. 이 배신감... ㅋㅋㅋ 덕분에 나도 편하게 내 할 일을 한다.

2011/12 시즌 처음으로 보게 되는 공연이었다. Orchestre de Paris를 통해 정말 부담없는 가격(5유로)에 구입한 티켓이었지만 나름 기대도 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콘체르토 중 하나인 쇼팽 2번과 베토벤 교향곡 5번이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협연자인 카시아 부냐티쉬빌리에 대해서는 젊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고 사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예르비의 5번을 꼭 실제로 들어보고 싶기도 했고. 전에 뉴욕필에서였나? 무슨 어디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였나 예르비와 뉴욕필(아마도)의 5번 라이브 음원을 무료로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인상깊게 들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다 : 보리에게 빨리 돌아갈 수 있다. 좋아.

첫 곡인 베를리오즈의 Ouverture du Corsaire 도 절대 나쁘지 않았다. 그냥 왠지 무대를 여는 첫 곡으로는 약간 정신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내가 방학에서 돌아오지 못한 탓인지, 집중이 좀 안됐다. 어쨌든 나는 베를리오즈를 좋아한다. 독보적인 스타일이다. 이런 곡은 베를리오즈밖에 쓰지 못한다.

고대하던 쇼팽 2번. 피아니스트가 들어오는데 와 깜짝 놀랐다. 그루지야 출신의 87년생 (사실 이젠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구나. 나보다 두살이나 어린데.) 여성 피아니스트인데, 외모만 보면 무슨 흑백시절 여배우라고 해도 믿을 고혹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입이 딱 벌어졌는데. 남자 관객들은 좀 많이 놀랐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실력에 비해 박수와 환호도 왠지 더 받은 느낌이다. 흉보려는 건 아니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연주하는 모습만 봐도 포스가 대단했다.
오랜만에 느끼하고 존재감 강한 Steinway & Sons 피아노를 들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좀 이상했다. 뭔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온 느낌.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결국 플레이옐 이 자리로 다시 끌어다 앉혀놓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제 공연을 보러 다닌 햇수도 꽤 되었고 특히 이 피아노 소리의 마력에 스스로를 무디게하고 길들여 온 노력도 많이 쌓여, 이젠 관객석 불이 꺼지기만 해도 스타인웨이 뚜껑을 젖히기만 해도 내 몸이 최적의 자세를 저절로 찾아가는 것 같다. 뭐 그냥 나의 바람일 수도 있고.
피아노 연주는 정작 그냥 그랬다. 내 귀에 많이 선 느끼한 스타일이었고 특히 1, 3악장 도입부에서 성급하게 윗 노트들을 대충 쳐넘긴 것은 참 별로였다. 2악장은 그냥... 대단한 특징은 없었다. 감정 과잉의 선을 위태위태하게 밟고 타는 연주로 느껴졌는데 듣기 편치 않았다. 기름에 절인 포도알 같은 느낌. 하지만 예쁘긴 참 예쁘더라.
앵콜곡으로 리스트 (올해는 리스트의 해!)의 Rêve d'amour 를 들려주었는데, 이건 정말 너무 심해서 내가 오죽하면 항의의 표시로 박수도 치지 않았다. 이렇게 연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원곡의 깊이도, 생동감도, 처연함도, 달콤함도 온데간데 없다. 하다못해 악보에 대한, 곡의 "형식"마저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었다. 파괴적이고, 지루했다.

베토벤 5번은 좋았다. 앗쌀한 도입부가 참 마음에 들었다. 묵직하면서도 날이 선 첼로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첼로 앞자리 두사람은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오늘 (내 귀에) 만족스러운 베토벤 연주에는 첼로 파트의 공이 컸다. 내가 사랑하는 4악장도 훌륭하게 그려내 주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파보 예르비는 (들라노에와 더불어) 파리의 보물같다. 멋진 지휘자다.

오늘 오랜만에, 3개월 만에 플레이옐에 가서 예르비를 보며 새삼스럽게 지휘자의 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다. 음악을 만드는 손. 지휘자의 지난 세월들이 다 그 손에 묻어난다. 그 손 끝에 아리도록 깊게 배인 힘과 자신감이 오늘따라 무척 또렷하게 보였다.
내가 과연 무엇의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
지금의 나로 출발해서 저 정도의 지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싶다.
아무것도 지휘할 수 없는, 어떤 음악도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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