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헤리치와 폴리니의 연주를 같은 주에 연달아 들을 수 있었던건 정말 큰 행운이다.
이 기회가 더 특별한 것은 이것이 몇달전에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 정도를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무엇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토요일인 오늘도 또 늦을세라 바삐 걸어 salle pleyel 에 갔다.
오늘은 지난 월요일보다는 눈에 띄게 한산했는데, 폴리니같은 거장이 연주하는 날인 것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레퍼토리를 보아하니 사실 그럴 법도 한 것이.
슈톡하우젠에 쇤베르크. 조금 힘들다..
그래도 마지막 곡인 브람스의 피아노 현악 5중주를 포기할 수 없어서.

오늘 본 공연은 Salle Pleyel이 기획한 "Pollini Perspectives", 즉 폴리니를 회고하는 일련의 콘서트 중 하나였다. 2008년부터 2010년에 이르는 기간을 아우르는 대형 프로젝트인데, 여기서 폴리니는 67세라는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창작열과 발전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줄 놀라운 레퍼토리들을 준비했다. 여기에 대해서 Le Figaro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자면 "현존하는 2-3명의 거장 중 한명이 되고 나면, 보수적인 관객들을 위해 쇼팽 리사이틀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쌓아온 영광과 성공을 유지하는데 만족하는 쉬운 길을 택할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쉬운 길"이란 폴리니가 알지 못하는 단어인 것 같다[각주:1]." 
그렇게 그는, 위대한 고전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의 연주에서 현대성을 끌어내고, 접목하고, 나아가 음악 세계를 넓히는 데 끊임없이 열중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양식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대중의 귀를 교육시켜 그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며 간과해왔던 모든 음악사의 단면들을 알게하는[각주:2]" 것이다.  (좀 찔림.)
이러한 말들에 걸맞게도, "Pollini Perspectives"의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소나타나 브람스, 바흐, 멘델스존 뿐만이 아니라 오늘 내가 들은 슈톡하우젠과 쇤베르크, Pierre Boulez, Alban Berg, Anton Webern, Luigi Nono, Luciano Berio 등 온갖 "어려운" 작곡가들로 가득하다.

뭐랄까 슈톡하우젠의 곡을 들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는데
우선 그건 첫째로 곡에 "여백"이 너무 많아서 집중하기가 솔직히 조금 힘들었기 때문인 것도 같고
두번째는 음...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커다란 콘서트 홀에 그랜드 피아노 앞 연주자가 앉아있는데도 곡 중간에 몇초간이나 정적이 흐르는 그 낯섦이라니.



피아노 독주(Klavierstücke VII, VIII & IX) 후 클랑포럼 비엔의 연주도..
화음이란 화음은 최대한 모조리 다 피해가기로 결심하고 만든 곡 같았다.
그러니까 익숙함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가 새삼 느낀다.
내게 음악이란 약간 변칙이 있긴 하지만 대개 노트들의 완벽한 조화와 끊임없는 선율만이 존재하던 어쨌거나 "아름다운" 그 무엇이었는데.
미술에서 Jean Dubuffet나 Marcel Duchamp이 안겨줬던 충격도 이런 것이었을까?
게다가 지휘자는 지금 저 곡을 다 이해하고 연주자들을 이끌고 있다는 말인가.
저 공백을 어떻게 계산을 하고 연주를 하고 지휘를 하는 건지.
오선지의 비어있는 부분도 저 노장에게는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무엇인건지.
그래도 공부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나를 진땀흘리게 하고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에 몰아넣었던 슈톡하우젠에 비해 쇤베르크는 오히려 듣기가 수월했다. 누가 프로그램을 짠건지 정말 영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고대하던 브람스.
오늘의 마지막 곡은 내가 아는 최고의 브람스였다.
사실 브람스 많이 들어 버릇하지 않아서 내가 생각해도 별 설득력이 없지만
아마 홀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Virtuoso Pollini. 정말 빛나는 피아노.
그리고 Quatour Hagen의 다른 4명의 연주자들이 워낙 잘했다.
다이애나비를 연상시키는 (멀리서 봤을때) 은금발의 비올리니스트의 열정적인 연주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1악장 allegro non troppo 에서는 저 사람들이 아까 저 띄엄띄엄 불협화음만 연주하던 사람들이 맞는지 좀 믿겨지지가 않아서 확인하려고 엄청 집중했고.
부드러운 2악장에서는 긴장이 살살 풀리더니 3악장 scherzo 에서는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손가락을 까닥까닥 수트 안에 점잖게 꼿꼿이 세운 등만 빼고는 전부 춤을 췄다.
마지막 4악장에서는 심장이 쿵쾅쿵쾅. 장중한 첼로소리와 반복적으로 죄어오는 피아노에 바닥으로 훅 떨어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 빠르게 앞으로 이끄는 비올라를 타고 밤하늘 위로 불꽃놀이 파편이 튀듯 쏘아올려진다. 황홀한 긴장감.

연주가 끝나자마자 정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레와 같은.
나도 정말 열심히 박수를 쳤다.
이렇게 좋은 연주에 어떻게 답례를 해야할지 몰라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박수를 쳤다.
계속된 연주에 힘이 부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앵콜곡은 따로 없어서 좀 아쉽긴 했다.
끊이지 않는 박수에 폴리니를 비롯한 연주자들은 인사하러 무대에 4번이나 다시 나왔다.

이건 작곡가가 원래 대단한 건지 연주를 특히 잘 한건지 나로선 분간할 수가 없다.
그저 양 쪽 다 대단하다고 밖엔.
반면 슈톡하우젠의 곡들과 같은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연주자의 실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워낙 음표가 별로 없어서....역시 어려워.



이런 행복한 토요일 밤을 내게 허락해준 모든 것에 새삼스레 감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좋았던 추억을 간직하면서 그 덕분으로 힘든 순간도 이겨낼 수 있는 거라면
오늘 내가 느꼈던 낯섦과 경외와 행복감이 언젠가 날 기다리고 있을 괴로운 어떤 하루를 또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 아닌가.
정말 힘겨운 날에는 미처 세상에까지 감사할 여유가 없을 지 모르니까 오늘 미리 해두어야겠다.
행복하다 오늘은 정말 :)


Salle Pleyel
Samedi 7 Mars 2009, 20H

Karlheinz Stockhausen
Klavierstücke VII, VIII, et IX
Kreuwspiel
Zeitmasze
Kontra-Punkte

Arnold Schönberg
Trois Pièces pour piano op.11
Mässig
Mässig
Bewegt

Johannes Brahms
Quintette pour piano et cordes en fa mineur op. 34
Allegro non troppo
Andante, un poco adagio
Scherzo, allegro
Finale, Poso sostenuto - Allegro non troppo

Klangforum Wien
Quatuor Hagen
Peter Eötvös, direction
Maurizio Pollini, piano



  1. Le Figaro, 2009년 1월 13일자. http://www.lefigaro.fr/musique/2009/01/23/03006-20090123ARTFIG00380-la-lecon-de-piano-de-maurizio-pollini-.php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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