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lini Perspective 프로젝트 (2011-2013) 가 올해도 돌아왔다.
오늘은 그 첫번째 공연.

폴리니 할아버지의 연주를 들으려면 이제는 응당 통과의례 내지는 수수료 ?! 와도 같은, "초"현대 음악 연주가 오늘도 역시 1부에 짜여져 있었다. 그래서 폴리니가 더 존경스럽고 그래서 팬이기도 한거지만 말이다. Giacomo Manzoni 가 작곡한 Il rumore del tiempo 가 그것으로, "시간의 소음"이라는 제목이다. 소프라노와 클라리넷, 바이올린, 퍼커션 그리고 폴리니의 파브리니 스타인웨이가 함께 하는 곡으로, 재작년이었나 루이지 노노의 성악곡 (이라고 할 수 있나? 그림으로 치면 mixed media 같은 그런) 의 충격 이후 소프라노가 등장하는 현대 곡들은 듣기 전에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성의 높은 목소리가 내는 불협화음과 그 미묘한 반음 톤들이 주는 기괴하거나 침울하거나 불길한 느낌이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이 과연 2천명 플레이옐 관객들 중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내 편견일까?

오늘 만조니의 곡 역시 그런 면에서 크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심지어 러시아어, 독일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된 시를 끊임없이 고음으로 "노래"하는 소프라노에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퍼커션과 아슬아슬한 바이올린까지 굉장한 합주였다. 피아노만은 그래도 어느 정도 귀에 익숙한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는 듯 싶었지만 뒤늦게 합류한 클라리넷이 또... 클라리넷 주자 (Alain Damiens) 소개를 보니 "클라리넷의 혁신의 주인공" 이라고 하던데 역시. 그래도 클라리넷 음색 자체가 워낙 곱고 듣기 좋아서 듣다 보니 그렇게 (부정적 의미의) "현대"스럽지만은 않았다. 나중에는 소프라노 목소리와 클라리넷이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멍하니 듣다가 생각해보니 "시간의 소음"이라는 표제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비꼬는 것이 아니고 정말. 루체른 페스티벌의 주문으로 폴리니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은 올해 80세인 작곡가가 지나온 길을 자전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Khlebnikov, Trakl, Blok, Zanzotto 의 시를 가사로 차용하고 있다. (이 중 누구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프랑스어 본이 livret에 실려있었는데, 여기 전부 번역해서 싣기는 힘들겠지만, 읽어보니 시들이 워낙 좋다. 내가 그 가사를 알아들을 수만 있었다면 어쩌면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가 되면 시간이 삐걱삐걱 지나가는 소음도 듣고 이야기도 듣고, 시로 음악으로 노래로 만들 수 있는걸까. 총 4편의 다른 시로 되어있지만 관통하는 이미지는 이렇다. 나는 그저 차분하게, 혹은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찰자의 입장이고 눈 앞은 온통 새까만 밤, 벽도 울타리도 없는 풀밭과 숲과 산 뿐이다. 바람과 물 소리가 들리고 새가 울고 달이 빛나고 있다. 한없이 고요하면서도 또한 온갖 소리와 움직임으로 가득한 그런 새까만 공간이다. 그 곳을, 내 옆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다.

소프라노 안나 프로하스카의 인사하는 포즈가 무척 독특하고 귀여워서 기억에 남는다.
폴리니 할아버지는 역시 이탈리아 남자 답게 ㅋㅋㅋ 만조니와 이야기 나누며 무심코 앞서 퇴장하다가도 순간 놀라며 소프라노 분을 먼저 가도록 챙기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ㅋㅋ 악수하고 사인받고 진상부리고 싶다.

아. 중간에 갑자기 고백하자면 나는 오늘 굉장히 찝찝한 기분인데
왜냐하면 내가 ...
내가
아파시오나타를 듣던 중 순간 졸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팍 꺾으며...
너무나도 치욕스러워서 여기 쓰는 것도 망설였지만
내 스스로가 답답해서 고해를 하지 않으면 오늘 편히 잠을 못 잘것 같다.
어제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해서 - 나는 7시간 깨지 않고 자지 않으면 일상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데 - 하루종일 졸려서 제정신이 아닌 것은 물론, 얼굴도 푸석푸석 눈 밑 피부가 장승처럼 처지는 그런 ... 힘든 하루였는데 폴리니 공연이기 때문에 또 기를 쓰고 나는 플레이옐에 가야했던 것이다. 변명같지만 정말 내가 베토벤 소나타 들으면서 게다가 폴리니 연주로 들으면서 졸! 수가! 없는데... 공연 보러 다닌 이래로 최악의 사건이다.
고백했으니 이제 또 다시 써야지. 기대만큼 후련하지는 않지만 별 수 있나.

오늘은 발트슈타인과 아파시오나타, 그리고 가운데 낀 피아노 소나타 22번이 연주되었다.
Waldstein은 특히 내가 진심으로 듣기 시작한 첫번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로, 요즘에도 매일 아침에 한번씩은 듣는 것 같다. 낮에도 밤에도 좋지만, 특히 아침을 시작하며 들으면 그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쨌든 프로그램은 이랬는데. 연주에 대해서는 참 그러고 보면 뭐라고 써야하나.
나는 음악 평론가가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도 아니다. 몇번 적은 적 있는 것 같은데 폴리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누군지 모르고 듣다가도, 뭔가 다시 돌려 듣고 싶고 이름을 확인하고 싶은 연주들은 거의 항상 폴리니였기 때문이다. 진짜 특히 베토벤 소나타에서 보여주는 그 완벽한 그림. 의연한 아름다움과 당당함, 기상이 단연 독보적이다. 내가 바라는 그런 요소들을 오늘 폴리니는 유감없이 보여준 것 같다. 중간중간 조금 음이 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폴리니임을 생각할 때 무척 놀랍지만)
흐름이 정말 좋다. 도입부에선 뭔가 탁 트인 풍경을 열어주고 곧이어 그 안으로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그 성취감과 흥분, 행복감으로 곡은 끝이 난다.

몰랐는데 22번도 참 좋더군. 2악장의 남다른 구성으로 11분 정도 안에 연주되는 짧은 곡인데, 듣는 것 만으로도 견과류처럼 오독오독 씹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하나. 재미있는 곡이었다.

내년 2월 14일에 피아노 소나타 24-27번, 2013년 1월 18일에 28-29번, 그리고 3월 18일에 30-32번이 계획되어 있다. 물론 전부 갈 테지만, 28번이 특히 벌써부터 너무너무 기대된다.
최근에 폴리니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아주 좋아보이셨다.
얼굴에서 빛이 나던걸.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제발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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