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이상하리만큼 강렬하게 다시 돌아오는 때가 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중학교 3학년이었던 김한결의 모습이 무척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하하
창피하고 후회되는 일들도 많지만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 걱정이 없었다.

집에 오븐이 생긴 것도 중3 때 였을 것이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오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케이크나 쿠키를 구웠다.
남대문 수입시장이나 이태원 근처 수입 식재료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무염버터나 조그만 식용 장식, 체리 럼주나 제과 기구들을 무지 사모았었는데.
교보문고 해외도서 코너를 출근하다시피 찾아가서 케이크 레시피 책을 몇번이나 들춰보았다.
물론 너무 비싸서 실제로 산 것은 한두권 뿐이지만 그때 샀던 100가지 케이크 레시피가 든 커다란 책은 당시 내겐 그 어떤 교과서보다 소중했다.
교과서라니 별로 느낌이 안 오는구나. 그 어떤 만화책보다 소중했다.
정말 제과제빵 쪽으로 나갈까도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었지만 곧 내린 결론은
집에 오븐이 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만드는 거지 내가 달리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잘 생각한 것 같다 ^_^;;

그리고 사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 당시 듣던 노래들이 생각나서인데 ㅋㅋ
고등학교 때 일본어과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어주었던
일본 노래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하고 애기같은데 그래도 뭐... 귀엽다 어렸으니까!
좋은 노래를 들으면 꼭 가사를 찾아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때도 그 생소한 일본어 가사들을 꼭 알아내 이해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가수는 speed라는 일본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ㅋㅋ
무엇보다 나랑 나이 또래가 비슷해서 더 "빠져들"었었나 싶다.

내가 정말 열심히 케이크를 구워 댔던 1999년의 겨울
그들의 새앨범 Carry on my way가 발매되었고
아마 나는... 예약주문까지 해서 그 앨범을 손에 넣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일본에 갔을 때 사왔었는지도 모른다...... 무서운 나의 집념...
아빠가 당시 꽤 신경을 써서 장만하셨던 거실의 홈시어터로 나는 그 앨범을 "줄창" 들었다.
밀가루를 곱게 체 치고 반죽을 하고 케이크틀에 유산지를 깔면서
계속 그 노래들을 외워서 따라 부르고 했던 기억들이 정말 생생하다.
내 기억으로는 그해 겨울엔 꽤 눈이 많이 왔었는데, 그 앨범에 든 노래들은 다들 겨울에 잘 어울렸다. 뭐 그때야 그들의 무슨 노래든 감사히 들었을 때였지만.

그리고 나는 그 이듬해 봄 친구들과 헤어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speed라는 그룹 역시 머지않아 해체되었다.
완전히 생활이 달라지면서 케이크도 더이상 만들지 않게 되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주 오랜만에 친구 생일에 머핀을 구워갔었는데
아주 아주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그 어린 여자아이들의 노래도 잊고 지냈었는데
오늘에야 문득 그 노래들이 다시 듣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2009년에 그들이 다시 모여서 옛 노래들을 재녹음하고 앨범을 냈다는 얘기가 있었다.
유튜브에서 찾아낸 바로 한달 전의 그들의 라이브 영상.
정말 많이들 자랐구나. 완전히 어른이구나.
벌써 10년전이니 그럴만도 하다.
더이상 창법도 목소리도 예전과 같지 않지만 그래도 듣는 것 만으로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난다.
아하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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