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라 아침 출근 인파도 없을테고 조금 늦잠을 자도 되지 않을까, 약간 꾀를 부리며 어제는 조금 느지막히 잠이 들었다. 웬걸, 일부러 알람도 꺼놨는데 7시 5분에 정확히 눈이 떠졌다. 눈꺼풀에 잠이 아직 좀 남아 잠시 고민을 했지만 크레이트 안에서 자고 있는 보리가 혹시 답답할까봐 결국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바로 문을 열어주었더니 역시 기지개를 피며 바로 집 밖으로 나온다.

오늘 아침엔 집 문간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보리는 아직 아파트 건물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산책 나갈때 혼자서 걸어나가기를 힘겨워 한다. 그래서 결국 내가 보리를 안고 "안전한" 장소까지 가서 내려주는 일이 많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법. 매일 못해도 5분씩은 집 현관에서 보리가 스스로 걸어나가도록 시간과 여유를 주기로 했다.
여차저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 까지는 했는데, 그 밑에서 또 망설여서 결국 내가 들고 나왔다. ㅠ 나도 성질이 급해서 참. 
어쨌뜬 30분동안 간략하게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시장에 들러 과일도 사왔다.
한 열흘 전부터 보리는 집 안에선 전혀 용변을 보지 않는다. 하루에 두번 산책을 나갈 때만, 그것도 매번 거의 같은 장소에서만 해결을 한다. 특별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참 신통하고 기특할 따름이다. 집 안에서 할 때도 언제나 욕실 안의 배변 패드로 향하곤 했지만 그 패드를 청소하는 것도 사알짝 귀찮고 욕실 안에 냄새가 밸까봐 조금 걱정도 했었는데 어쩜 이렇게 이쁠 수 있을까.

한시 반쯤 또 보리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동네 친구를 만나 같이 커피도 한잔 하고 한국 슈퍼에 걸어서 다녀왔다. 보리가 한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길을 참 오래도 걸었는데, 더군다나 날이 좋은 토요일이라 쇼핑하는 인파와 자전거, 차도 굉장히 많아 요 어린 것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꽤 많은 구간을 의젓하게 옆에서 잘 걸어주었다.
4시쯤 집에 돌아왔는데, 보리는 아니나 다를까 바로 쓰러져서 7시까지 곤히 잤다.

8시에 다시 저녁 산책을 나갔다. 좀 천천히 30분쯤 걸을까 하고 나갔는데 빗방울이 뜨문뜨문 떨어지길래 좀 당황했다. 그래도 앞으로 겨울 몇 개월 동안 비가 얼마나 많이 올텐데, 이정도 비에 질 수는 없지. 역시 보리도 시골개 ^_^ 답게 빗줄기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할 일 다 하고 ㅋㅋ 전혀 뒤쳐지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내 옆을 곧잘 따라왔다. 집에 들어갈 때 까지 한번도 목줄을 당기지도 않아 너무 예뻤다. 흑흑...... 중증인 것 같다.
비도 맞았고 목욕 시킬 때도 슬슬 되었고 해서 바로 샴푸. 그리고 바로 또 주무시더라.
뽀송뽀송 보리 털에 코를 마구 파묻었다. 오늘 밤까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껏 만끽했다. ㅋㅋ
내일 일요일은 또 무엇을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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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글의 카테고리를 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에게있어 한동안 오늘이란 즉 보리. 즉 오늘-보리=0 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냥 보리로 분류한다.
왜 뿌듯한 하루이냐, 그것 역시 보리 때문이다.

브라이언 킬커먼스의 "Good Owners, Great Dogs"를 아마존에서 중고로 2유로 남짓한 돈에 구입해 벅벅 줄 그어가며 읽고 있다. 여름에 친구...께서...빌려주신... 3권의 강아지 키우기 책 중 한권이었는데, 나중에 왠걸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촌언니가 처음으로 기획에 참여해 펴낸, 특별히 소중히 생각하는 책이라며 추천해주는 것이 아닌가. 씨저 밀란의 책들을 어느정도 다 읽고도 약간 디테일에서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 이 "훌륭한 주인이 명견을 만든다 (한국 제목)" 가 생각나기에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역시 있었다. 영국에서 배송되어 심지어 아주 빨리 도착했다.
그에 의하면 개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딱 두가지다. Praise, 그리고 Correction. Punishment 란 없다. 내겐 너무 완벽한 보리이지만 한가지 걱정스러웠던 점은 요 며칠 또 산책 나가기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가지가 아니군) 걷다가 중간중간 자전거나 킥보드 등에 말그대로 freak out 한다는 것이었는데 ( = 통제불능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 몇몇 정신없는 사람들이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면 보리는 간혹 차도로 도망치는데 이때 차라도 달려오면 정말 큰일이 날 것같다) 오늘 이 책을 꼼꼼히 읽고 많이 배웠다.
어쨌든 보리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격려하고 이뻐해주며 걸으니 오늘 산책은 한결 편안하고 또 즐거웠다. 그렇게 보리에게 칭찬을 하고 예쁜 말을 해주면서 나 역시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니 금상첨화인 것 같다.

음. 점심때 친구를 만났는데 강아지 얘기를 듣더니 내가 꽤나 애정결핍인 것 같다고 한다.
단지 나는 보리가 내 발치에 와서 앉을 때 너무 행복하고 코고는 소리 들으면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을 뿐인데 그런 "사소"한 일에 즐거워 하는 것이 좀 이상해보였나 보다. 가끔 스스로도 내가 애정결핍이 아닐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냥 누군가에게 줄 마음이 너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그러고보면 처음 강아지를 데려오겠다 결심했던 것도 누군가를 가까이서 챙겨주고 애정을 주는 것이 그립고 절실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보리가 나의 그런 바람을, 허전한 마음을 얼마나 채워주고 있는지. 신기한 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또한 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라니. 참으로 오묘한 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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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서둘러 돌아와 바로 보리를 크레이트에서 꺼내주고, 물 한잔을 들이키고, 설거지를 하고,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집에 혼자 있을 보리가 안타까워 첫번째 커튼콜에 부리나케 집으로 내달렸는데 이녀석은 내가 와도 한 5초 동안 간략히 신나하다가 이내 자기 할 일 (= 소가죽 개껌 뜯기) 에 몰두한다. 이 배신감... ㅋㅋㅋ 덕분에 나도 편하게 내 할 일을 한다.

2011/12 시즌 처음으로 보게 되는 공연이었다. Orchestre de Paris를 통해 정말 부담없는 가격(5유로)에 구입한 티켓이었지만 나름 기대도 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콘체르토 중 하나인 쇼팽 2번과 베토벤 교향곡 5번이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협연자인 카시아 부냐티쉬빌리에 대해서는 젊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고 사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예르비의 5번을 꼭 실제로 들어보고 싶기도 했고. 전에 뉴욕필에서였나? 무슨 어디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였나 예르비와 뉴욕필(아마도)의 5번 라이브 음원을 무료로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인상깊게 들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다 : 보리에게 빨리 돌아갈 수 있다. 좋아.

첫 곡인 베를리오즈의 Ouverture du Corsaire 도 절대 나쁘지 않았다. 그냥 왠지 무대를 여는 첫 곡으로는 약간 정신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내가 방학에서 돌아오지 못한 탓인지, 집중이 좀 안됐다. 어쨌든 나는 베를리오즈를 좋아한다. 독보적인 스타일이다. 이런 곡은 베를리오즈밖에 쓰지 못한다.

고대하던 쇼팽 2번. 피아니스트가 들어오는데 와 깜짝 놀랐다. 그루지야 출신의 87년생 (사실 이젠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구나. 나보다 두살이나 어린데.) 여성 피아니스트인데, 외모만 보면 무슨 흑백시절 여배우라고 해도 믿을 고혹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입이 딱 벌어졌는데. 남자 관객들은 좀 많이 놀랐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실력에 비해 박수와 환호도 왠지 더 받은 느낌이다. 흉보려는 건 아니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연주하는 모습만 봐도 포스가 대단했다.
오랜만에 느끼하고 존재감 강한 Steinway & Sons 피아노를 들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좀 이상했다. 뭔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온 느낌.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결국 플레이옐 이 자리로 다시 끌어다 앉혀놓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제 공연을 보러 다닌 햇수도 꽤 되었고 특히 이 피아노 소리의 마력에 스스로를 무디게하고 길들여 온 노력도 많이 쌓여, 이젠 관객석 불이 꺼지기만 해도 스타인웨이 뚜껑을 젖히기만 해도 내 몸이 최적의 자세를 저절로 찾아가는 것 같다. 뭐 그냥 나의 바람일 수도 있고.
피아노 연주는 정작 그냥 그랬다. 내 귀에 많이 선 느끼한 스타일이었고 특히 1, 3악장 도입부에서 성급하게 윗 노트들을 대충 쳐넘긴 것은 참 별로였다. 2악장은 그냥... 대단한 특징은 없었다. 감정 과잉의 선을 위태위태하게 밟고 타는 연주로 느껴졌는데 듣기 편치 않았다. 기름에 절인 포도알 같은 느낌. 하지만 예쁘긴 참 예쁘더라.
앵콜곡으로 리스트 (올해는 리스트의 해!)의 Rêve d'amour 를 들려주었는데, 이건 정말 너무 심해서 내가 오죽하면 항의의 표시로 박수도 치지 않았다. 이렇게 연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원곡의 깊이도, 생동감도, 처연함도, 달콤함도 온데간데 없다. 하다못해 악보에 대한, 곡의 "형식"마저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었다. 파괴적이고, 지루했다.

베토벤 5번은 좋았다. 앗쌀한 도입부가 참 마음에 들었다. 묵직하면서도 날이 선 첼로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첼로 앞자리 두사람은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오늘 (내 귀에) 만족스러운 베토벤 연주에는 첼로 파트의 공이 컸다. 내가 사랑하는 4악장도 훌륭하게 그려내 주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파보 예르비는 (들라노에와 더불어) 파리의 보물같다. 멋진 지휘자다.

오늘 오랜만에, 3개월 만에 플레이옐에 가서 예르비를 보며 새삼스럽게 지휘자의 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다. 음악을 만드는 손. 지휘자의 지난 세월들이 다 그 손에 묻어난다. 그 손 끝에 아리도록 깊게 배인 힘과 자신감이 오늘따라 무척 또렷하게 보였다.
내가 과연 무엇의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
지금의 나로 출발해서 저 정도의 지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싶다.
아무것도 지휘할 수 없는, 어떤 음악도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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