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갑자기 너무 추워서 방금 밤 아홉시 반쯤 산책을 나갔을 때는 털모자를 써야 했다.
하지만 장갑까지 꼈다면 좀 더웠을 것 같기도...
내일 모레는 하필이면 수업 두 개가 연달아 있는 바람에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집을 비워야 해서 보리가 조금 마음에 걸린다. 뭐 조금 힘들더라도 알아서 잘 있겠지만... 못내 걱정이 되어 친한 친구에게 오후 쯤 우리집에 좀 와서 책 읽고 차 마시고 있어줄 수 있을지 부탁을 해두었다.
보리가 없어서 하루종일 내 마음대로 밖을 쏘다녀도 되었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그때보다 지금이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그런 적이 있었구나, 새삼 깨닫는 정도다.

보리랑 산책할 때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은 둘이서 같은 속도로 나란히 뛸 때다.
보리는 내가 뛰면 같이 뛰고 서면 자기도 선다. 나랑 보조를 맞춰서 걷는 이 네발 짐승 이럴 때 정말 아빠 말대로 종(種)을 뛰어넘는 순수한 마음의 교감을 느낀다. 이 밖에도 기분이 너무 좋아 마음이 벅차오르는 순간이 꽤 많이 있지만서도. 보리랑 뛰는 게 정말 즐겁다. 방금은 너무 열심히 뛴 나머지 큰 털모자가 내 눈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서 곤란했다.

오늘은 루브르에서 1996년, 전설적(?)인 큐레이터이자 교수였던 Louis Courajod 루이 꾸라조의 사망 100주년을 맞아 열었던 콜로키움의 자료집 "Un combat pour la sculpture" 를 읽었다. 사실 작년에도 여러번 들여다 보았던 책이지만 그때랑은 조금 다른 목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읽으니 또 달랐다. 골치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루이 꾸라조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참으로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도 나는 누군가의 문체, 결국은 글이겠지만, 어조에 감동을 받으면 그 사람을 학자로서 존경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꾸라조는 워낙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훌륭한 학자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점잖지만 확신에 찬, 혹은 결의에 찬 어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누군가의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평가했을 때보다는 글의 문학적인 요소들에서 좋다 혹은 싫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래서 나는 선행연구 분석 (historiographie)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번 논문은 주로 한 사람의 저작과 활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의 monographie 에 가까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지만 감정적으로 생각해서 글을 쓰면 아주 엉망진창이 될 텐데 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꾸라조의 루브르학교 강의록을 소장하고 싶어서 구입했을 정도로 그의 말과 글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데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내가 그 이유를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일단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읽을 것은 Elizabeth Emery 와 Laura Morowitz가 함께 쓴 "Consuming the Past : The Medieval Revival in fin-de-siecle France" 라는 2003년 책으로 지금까지 나온 (+ 내가 접한) 학술서들중에선 내 관심 분야와 가장 많이 근접해있는데, 그래서 좀 읽기가 무섭다. ㅎㅎ내가 하려고 했던 말들이 다 들어있을까봐 조마조마. 그래도 이 책은 박물관학이나 박물관, 전시 史 의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는 건 아니니까.......구멍이 있겠지 어딘가.!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보니 내가 잘 보이는 위치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 누운 보리가 너무 사랑스럽다.

관악기들의 매력을 몰랐는데 요즘 클라리넷과 바순이 너무 좋다.
얼마전 라디오클라식의 passion classique에서 Michel Portal 이 본인이 옛날에 연주했던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를 들려주었는데 갑자기 마음에 확 들어왔다. 방금도 무슨 바순 콘체르토인가를 들었는데 좋았다. 이름을 확인해 본다는 걸 놓쳤네. 그래도 바순은 나는 교향곡이나 관현악곡에서 듣는 게 훨씬 좋더라. 클라리넷은 독주로 들을 때 더 오묘한 맛이 있는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악기지만 얼마전 Laurent Korcia의 신보에 들어있는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너무 좋아서. 그런데 하이페츠가 본좌 ㅎㅎ라기에 찾아 들어보니 역시... 근데 코르시아의 매끈하고 풍성한 새 녹음도 편히 듣기에는 좋더라.
AND

아빠처럼 나도 마음잡고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읽고 싶은"이 아니라 정말 읽어야 만 할) 눈에 밟혀 며칠 전부터 제목만 써놓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 한 문장 안에만해도 스트레스를 생성하는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이를 다시 되뇌여보는 나의 마음은 황무지와 같다.

오늘 아침에도 조금 느지막히 산책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젯밤 너무 늦게 잠들기도 했고 토요일이라 출근 인파가 없어 좀 여유를 부린 탓도 있다. 어제 꽤 늦은 시간에 보리를 데리고 나갔었으니 한시간 쯤 늦어져도 괜찮겠지 싶었기도 하고. 보리는 내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후부터 부쩍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목걸이만 손에 들어도 나에게 마구 뛰어와 부비질 않나, 문을 여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질 않나, 별일이다. 그리고 부쩍, 우리 동네를 자기 동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예 모르는 곳이나 인파가 많은 곳에 가면 나만을 의지하며 멈추지 않고 바짝 따라 오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다니는 늘 같은 산책코스에서는 나름 주변을 "관리"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쪽 저쪽으로 겁없이 쏘다닌다. 함께 똑바로 걷는데 꽤 엄격한 나이지만 친근한 장소에서 친근한 다른 개들 흔적을 찾는 것 뿐인데 너무 빡빡하게 굴 것 있겠나 싶어 조금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 그래도 5-10분 정도는 꼭 내 발치에서 얌전히 걷게 하니 아마도 크게 잘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Quai Branly 박물관의 도서관 - 엄밀히 말하면 mediatheque - 이 그렇게 분위기도 괜찮고 좋다기에 계속 벼르다가 오늘 오전에 처음으로 한번 가 보았다. 원래 다니던 2구의 INHA 미술사도서관과 13구의 BNF가 내 전공 책들을 찾아보기에는 최고지만 가는 길이 멀어서 보리를 키우기 시작한 후로는 각각 다섯번도 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께 브렁리 박물관은 버스만 제시간에 와준다면 15분 내에 갈 수 있고, 여차하면 자전거로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 곳의 도서관이 괜찮다면 나한텐 정말 꽤 좋은 일이다. 11시나 되어야 열지만 저녁 8시까지는 열려있고 무료인 것도 큰 장점이다.
께 브렁리 박물관 안뜰의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늘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도 역시 보기 좋더군. 지금은 마오리족 문화 예술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에 갈 때 한번쯤 들러보아도 좋겠다. 께 브렁리 박물관은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제3세계" - 즉 이곳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비서구권 민족과 나라들의 문화 예술과 유물을 다루는 상당히 쿨한 곳으로, 예술과 인류학과 민족학과 역사학이 어우러진 상당히 쿨한 곳이다. 재작년에 재즈 음악 전시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요즘 나는 내 인생 덜렁이 시기의 최정점에 있기 때문에 역시나 준비물인 증명사진을 잊었지만 수염쟁이 아저씨는 집에 가서 직접 붙이라며 흔쾌히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쨌든 도서관은 환상적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아주 넓고 두꺼운 나무 책상과 적절한 조도, 전부 통유리로 세느강을 향해 확 트인 공간이 정말 최고였다. 연지 얼마 안 된 시간이어서 아직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사람도 거의 없어서 무척 조용했다. 책도 금방 찾아다 주었고.
앞으로 자주 가야겠다. 가까운 곳에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오랜만에 모노프리에 들러서 먹을 것들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보리가 없을 때는 모노프리에 일주일에 두세번은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근 3주 만에 처음 갔다.
다녀와서 보리를 데리고 다시 나가 얼마전 주문했던 보리 사료를 찾아가지고 왔다.
소포 안에서 벌써 사료 냄새가 나는지 엄청 킁킁대더라. 개는 개야.


글 쓰다말고 보리 잘 있나 보러 가서 엉겁결에 보리를 품에 안고 재웠다. 보리는 코골고 나도 그걸 듣고 있다보니 약간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1악장이 거의다 끝날 때 까지 안고 있었으니 꽤 오랫동안 한 자세로 보리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밖에서 소리가 나서 보리가 고개를 번쩍 들기에 소파에 얌전히 내려놓고 왔는데 왼팔과 허리가 무지 아프다 ㅋㅋ 윗 사진은 며칠전에 찍었던 거였는데 방금도 똑같은 옷에 비슷한 자세로 보리를 재웠다. 오늘은 다만 내 어깨 쪽에 머리를 기대고 자더라. 아이고 귀여워 죽겠네.


AND


너무 졸려서 간단히 쓰려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굉장한 공연이었다.
신들린 합주.

Colin Matthews의 Grand Barcarole pour l'orchestre 도 아주 좋았는데 바르카롤레라기보다는 심해의 잠수함을 위한 혹은 거대한 범선의 장엄한 출항을 위한 곡 같았다. 그래서 grand 인가.

8번 1악장 첫부분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경도되었다. 게반트하우스랑 샤이 너무 멋있다........
합창석임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부피에, 음장에 공기가 밀려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8번은 정확히 7번과 9번 사이에 위치하는 느낌이어서 재미있었다.
강과 약의 대비가 화려하고 기세 좋은 무척 듣기 좋은 곡이다.
팀파니가 진짜... 와 정말 대단했다.
숨을 쉬질 못하겠더라.

3번에서 역시 8번의 기세를 그대로 몰아 엄청나게 강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22일 공연에서 샤이의 지휘를 도자기에 비유했었는데. 아니다. 오색찬란한 보석이었다. 샤이를 정면에서 보면서 그의 손과 눈빛을 따라가며 연주를 들으니 뭐 한순간도 끈을 놓을 틈이 없었다. 음악을 저렇게 사랑할까? 정말 저렇게 좋아하는구나. 저렇게 행복하구나. 주제를 모르고 조금 질투까지 났다. 저번에 무엇도 지휘할 수 없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썼었는데, 오늘도 그 생각을 했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처럼 그만큼 내 일에 집중하고 싶고 그 몰입의 순간에만은 완전히 행복하고 싶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처럼. 샤이 뿐만 아니라 단원들 전부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인텐스한 연주가 나올 수가 없을 것 같다.
1악장의 완벽한 하모니는 말할 것도 없고 2악장에서는 특히 오보에와 콘트라베이스가 너무나도 잘했다. 그동안 집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오래된 녹음으로만 들어서 그 고색창연한 소리가 귀에 익었었는데 그와는 다른 "오늘"의 연주도 듣다보니 금방 좋아졌다. 번쩍 번쩍 윤이 나고 날이 선 관악과 나무 맛이 살아있는 입체적인 현의 소리. 3악장 4악장에서도 정신없이 빠져들어 머리가 아플 정도.
좋구나. 자리 때문에 직접 보지 못해서 너무 아쉽지만 팀파니 정말 잘한 것 같고 오보에 플룻 바이올린 다 좋았다. 2악장 후반부 쯤에서 현악만 파트 별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눈물이 다 날 뻔 했다.

내일모레 아일랜드 가기 전날 9번을 들으러 간다. 1번, 7번 그리고 4, 6번은 예매하지 않았다. 작년에 갔던 틸레만과 빈필의 베토벤 싸이클 때와는 거의 반대의 구성이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게다가 둘 다 너무 훌륭한 오케스트라들이라 내 수준에서 하는 비교는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샤이와 게반트하우스의 정말 신들린 듯한 연주와 지휘자와 연주자들 간의 호흡 - 거의 서커스!? 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정도 - 과 결속력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졸리다.ㅠ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