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이야기만 나흘째.

오늘 보리 때문에 이것저것 한 일이 많아 이상하게 일찍부터 피곤하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처음으로 수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왔다는 것.
일민언니가 소개해 준 곳으로 갔는데 역시 듣던 대로 굉장히 진지하고 친절하고 믿음이 가는 분이었다. 보리 정말 자알 생겼다며 나중에 쇼에 나가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ㅋㅋ 꼭 줄 매서 다니라고... 동네에서 부러워 하는 사람들 많겠다며. 안정되고 침착하고 좋은 개라고 칭찬을 들었다.
아쉽게도 혈청검사를 하고 6개월이 지나야 영국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 아빠가 계신 동안에는 보리와 런던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한국에는 무사히 갈 수 있을 듯 하다.
모든게 다 정상인데 딱 한가지 "souffle-coeur" 라는 증상이 보인다고 하셨다. 이는 어린 개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불규칙? anormal 한 심장 박동을 말하는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한달 쯤 후에 다시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물어보고 싶었던 것, 불안했던 것들 모조리 다- 여쭤보고 나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고 보리와의 생활에 조금 더 자신이 생겼다. 말롱고에 가서 떼 프라페를 마시고 동네를 크게 한바퀴 돌아 저녁 7시 쯤 집에 돌아왔다.

전에 주문했던 Cesar Millan의 책 두 권이 오늘 도착했는데 침대에서 읽으며 잠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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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와 산책하는 것에 제법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꼭 해야한다는 부담감 내지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보리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일요일인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처럼 주변 상점들도 조용할 것이고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도, 시끄럽게 킥보드나 롤러브레이드 타는 초딩들도 없으니 둘이 걷기엔 딱 좋을 것 같았다.

avenue de suffren과 avenue de segur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보리는 빙빙 돌거나 네발로 완강하게 버티며 15분 동안이나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이럴 때는 보리가 특히 정말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길을 피해 살짝 돌아서 가면 결국 내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된다. 개는 참 알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또 참 단순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리랑 둘이서 꽤 진지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다보면 대체 내가 지금 뭐하는 건지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는 invalides 였는데 가는 도중에 소나기가 마구 쏟아져 근처 열려있는 까페 테라스로 무조건 피신했다. 어제 보리 목욕시켰는데 ㅠㅠ흑흑...

잠시 앉아 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보리가 계속 헥헥거리고 있길래 물을 주려고 종업원에게 혹시 종이컵 같은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참을 안 오길래 까먹었나 했는데, 웬걸 커다란 플라스틱 통? 에 물을 가득 담고 빨대 두개에 레몬 슬라이스까지 끼워서 대령하는 것이 아닌가. 보리를 위한 칵테일이라며.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정말 파리 사람들이 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이런 살아있는 애교와 위트.
보리는 애초에 별로 목이 말랐던 게 아니었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즐거웠다.
나중에는 웨이터에다가 매니저까지 나와서, 강아지가 칵테일 잘 마시나요? 빨대로 마시나요?? 하고 자꾸 물어보는데 보리는 빨대는 고사하고 ㅋㅋ 물도 거의 안 마셔서 좀 미안했다.
비가 심해지고 테라스 천막 안 테이블까지 영향권에 들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들 모두가 강아지를 좋아해서 무척 친절하게 보리를 맞아 주었다. 옆자리 혼자 오신 할머니는 연신 보리에게 뽀뽀를 날리시며 당신이 옛날에 키우셨다는 저먼 포인터들 이야기를 두런두런 해주셨는데 사실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안에 들어오자 보리는 특제 칵테일을 조금 마셨다.


그래서 결국 parc des invalides 에 도착했다. 꽃이랑 정원수를 너무 예쁘게 가꿔 놓았길래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걸음을 신나게 재촉했는데 개는 출입할 수 없단다. 김빠져서 그 앞 난간에 보리랑 둘이 걸터 앉아 시간을 좀 보냈다. 집념어린 셀카도 찍었다.



그렇게 앵발리드를 뒤로 하고 집에 오니 이미 3시간이 흘러 있었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보리도 좀 쉬게 하고, 저녁밥도 주었다.

아직 해가 좀 남았길래 8시 반쯤 보리랑 다시 산책을 나갔다.



묘한 푸른색이 층층이 어우러진 하늘과 에펠탑과 선선한 바람과 (사실 좀 추웠다) 나뭇잎 바삭이는 소리, 정말 좋았다. 집 앞에서 보리가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아서 좀 실랑이를 했다.



유네스코 담벼락에는 늘 세계 이곳 저곳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리랑 산책하면서 이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또 쏠쏠하다. 또 보고 또 보고...


오늘은 처음으로 보리가 아파트 건물 계단을 자기 힘으로 오르내리는 법을 배운 날이고
처음으로 산책나가서 응가를 한 날이다. ㅋㅋ이런 것 하나도 너무 기쁘다.

너무 많이 걷고 뛰어서인지 보리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렸다.
음... 이러다 몸살 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된다.
가서 한번 쓰다듬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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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코고는 소리 끙끙 잠꼬대 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솔직히 조금 더 게으름 피우고 싶었는데 어서 빵 사와서 아침 먹고 보리랑 산책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보리는 눈 뜨고 바로는 식욕이 별로 없는지 아침밥을 줘도 입도 대지 않는다.
내가 아침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도 사료가 그대로여서, 기다리다 못해 결국 아침 산책을 나섰다.
그냥 가볍게 나갔다 오려던 생각이었는데 집 앞 avenue de segur 를 쭉 걸어가 유네스코 후문을 돌아 avenue suffren을 따라 내려오는, 처음 가보는 코스로 걷게 되었다. ㅎㅎ보리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을 피하다보니. 아직은 시끄러운 사람들이 많지 않은, 좀 조용하고 안정된 코스를 걷는 것이 보리에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가 또 어쩌다보니 avenue suffren을 쭉 따라 내려오지 않고 중간에 boulevard garibaldi로 돌아서 좀 시끄러운 길로 귀가하게 되었는데, 그 길은 꽤 붐비는 대로인데다 길 가운데 6호선 지상 전철이 다녀 소음이 크고,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커다란 카센터까지 있어 내심 걱정을 했다.
그래도 보리는 의젓하게 걸어주었다. 다만 카센터 앞에서 엄청 시끄러운 마찰음, 정비사들끼리 외치는 말들, 자동차 움직이는 소리들에 홀려 자꾸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 제지하느라 혼이 났다. 카센터 아저씨들이 당황하는 나를 보며 웃는 것을 꿋꿋이 참고 보리가 궁금증을 다 해소할 때까지 앞에서 기다렸다가, 보리가 신중하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퉁이를 돌아 집에 왔다. 이번에는 보리를 안아 올리지 않고 제 발로 아파트 현관문을 통과하게 했다.

집에 낮에 둘이만 있으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데 좋은 점이야 굳이 일일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나쁜 점이라면 사실 나에게서 오는 문제인 것 같다. 역시 보리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게 되는 것. 보리가 낑낑거리거나 좀 심심해보이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쩔쩔매고 만다.
아무 할 일이 없고 보리랑만 놀면 된다 - 는 생각은 이제 하지 말고, 내 할 일들을 우선으로 찾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저녁에도 산책을 나갔는데 동네에서 보리 정도 크기의 개들을 산책시키는 주인들을 만나 중간에 이야기도 나누었다. 11개월 된 회색 푸들을 산책시키던 아주머니는 나한테 이것 저것 충고를 해주었는데, 무엇보다 보리가 어리고 도시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산책하기 어렵고 같이 살기 힘든 것은 아직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해주어서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그 푸들도 보리랑 똑같이 시골에 살다가 파리에 온지 1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 사니까 또 볼 일이 있겠다며 웃으며 헤어졌는데 각자 다른 길로 가다가 건널목에서 또 마주쳤다.
다른 아줌마는 좀 요란스러운 스타일이었는데 (눈에 초록색 왕 반짝이를 일상에서 그렇게 바르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봄.) 새하얀 말티즈 같은 소형견을 데리고 있었다. 건널목에서 보리가 중간에 딱 멈춰버려 나도 거기에 서서 보리를 기다리고 ^_^있는 상황에 마주쳤는데, 역시 그 분도 이렇게 어린 강아지에게 산책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며 고맙게도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킁킁대는 보리가 무서워서 말티즈를 냅다 끌어안고 내새끼 빨리 가자, 하기에 실소가 나왔다.

아참 오늘은 여행용 이동가방에 들어가는 훈련도 했다.
역시 너무 말 잘듣고 차분하고 똑똑한 보리다.
월요일엔 보리 건강 상태도 직접 체크하고 필요하다면 주의사항도 좀 들으러 동네 동물병원에 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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