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을 넘게 함께 계셔주시던 아빠가 아침에 런던으로 떠나셨으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보리와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둘이서 말이다.
아빠를 북역까지 바래다 드렸는데 다른 때와는 달리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보통 때는 아빠가 떠나면 괜시리 집에 가지 않고 거리로 겉돌거나 집에 가더라도 느릿느릿 버스를 탔다 걸었다 꾀를 부렸었는데 오늘은 그런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집에 혼자 있을 보리를 생각하면 입맛도 딱 떨어지고 바깥 풍경도 재미가 없었다. 지하철에서 시간 때우려고 펴든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계단도 성큼 성큼 두개씩 오른다.

그렇게 해서 집에 도착했더니 보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지하게 흥분해서 나를 반긴다. 아마도 아침에 아빠가 커다란 짐을 다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서는 모습이 자기가 보기에도 수상하게 느껴졌던게 아닐까. 아니면 아빠가 잠든 보리를 쓰다듬으며 이런 저런 부탁인지 다짐인지 두런두런 말을 건네던 것이 미리 하는 작별 인사였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지. 자꾸 의인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보리가 날 반기는 모양이 다른 때완 달라서 자꾸만 끼워 맞추려 상상을 하게 된다. 안그래도 오늘부터는 든든한 아빠가 없고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보리가 문 앞에서 이렇게 날뛰며 좋아하니 어쩐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내가 없을 때 혹시 애태우고 힘들어하면 어쩌나, 내가 있어도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기라도 하면 어쩌나, 안그래도 걱정이 많은 내 성격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겨우 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하는 것 같더니 돌아 앉은 내 등을 향해 보리가 깽!! 하고 짖었다. 세상에....... 보리가 날 보고 짖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같이 지난 기간이 얼마 되지 않고 앞으로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침착하고 순하던 보리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그렇게 큰 소리를 냈다는 것은 "첫날"인 오늘 겪기에는 좋지 않은 징조 같아 보였다. 아빠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나마 꽤 긴장을 했었나보다. 스트레스를 풀어주겠다고 보리를 일단 줄에 매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 같다. 밖에 나갔더니 길거리엔 웬 공사가 시끄럽게 한창이었고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보리가 오들오들 떠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내가 먼저 보리에게 든든하고 믿음직한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냥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피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을 깨닫고 바로 보리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풀어주었더니, 보리는 금세 조용해졌다.

그 틈에 좀 씻고 정리도 하고 하다가 보리가 꾸벅꾸벅 졸기에 슈퍼에 가서 장을 봐왔다.
바보같이 서두르다가 보리 주려구 샀던 gruyere 한 토막 (비싼건데 ㅠ)을 계산대에 그대로 놓고 와버렸다.
어쨌든 3-40분 만에 집에 도착하니 보리는 잠을 자다가 집에서 쭈뼛쭈뼛 걸어나와 나를 반겼다. 아까 오전에 그랬던 것 보다는 훨씬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에 불안해하고 안심하고 이러면 좋을 것 하나도 없고 너무 피곤하기만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첫날이니 그렇고 점점 나아질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했다.

보리는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가 다 되도록 잠만 잤다. 8시에는 친구가 집 앞으로 와서 같이 보리를 데리고 나가 20분 정도 산책을 했다. 기특하게도 내 옆에서 의젓하게 잘 걸어주었고 며칠 전보다 차소리나 자전거, 오토바이 등의 소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아 너무 이뻤다. 건널목에서 중간에 한번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어느새 빨간불이 들어와 한번은 보리를 안고 건넜다. 그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집채만한 시커먼 왕개가 산책하고 있는 것을 마주쳤는데 보리는 역시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어제는 샹드막스에서 좀 이상하게 큰 잭러셀테리어 한마리가 보리한테 마구 뛰어오길래 나도 모르게 보리를 품에 안고 피했는데, 내가 너무 겁이 많아 오히려 용감한 보리를 잘못 키울 뻔 했다.

오늘은 아파트 현관의 커다란 쇠문도 크게 무서워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서 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대로 못했는데. 너무 이쁘다. 무사히 집에 들어와 발을 물로 닦아줬더니 정말 쌔까맣다 ㅋㅋ 아이고. 귀 청소 해주려고 했는데 보리 너무 겁먹어서 한쪽 귀 밖에 못했다....ㅋㅋ

일찍 자고 내일부턴 아침 일찍, 그리고 해 질때 쯤 밤에 이렇게 두번 딱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집 앞에 유치원이 있어서 낮에는 아이들이 시끄러워 보리가 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음. 이것도 내 과한 걱정이려나.

아빠랑 셋이 있을 때는 늘 아빠랑 내가 둘다 보이는 자기 크레이트 앞에서 잠을 자거나 놀거나 하더니, 내가 이제 혼자서 내 책상 앞에만 앉아있으니 줄곧 내 등 뒤에만 있는다. 가족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항상 보고 싶은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또 안쓰러워 맘이 무거워진다. 그러지 말아야지. 보리와 함께 사는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큰 공부이고 숙제인 것 같다. 보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바라고, 채근하기 보다 내 스스로가 조금 더 당당하고 용기있고 중심 잡힌 사람이어야 앞으로 둘의 생활이 행복할 것 같다.
AND


전석 매진이 너무나도 당연한 날이었다.
드뷔시의 바다, 라벨의 피아노 콘체르토, 그리고 베토벤 7번.
거기다 에사-페카 살로넨, 다비드 프레, 파리 오케스트라.
어떤 프랑스 인이 이 공연을 기대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당일 표 판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섯시 반부터 이미 셀 수 없는데
한시간이 지나도록 취소표는 커녕 암표(?) 하나 나오지 않아 거의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파리 오케스트라 회원 프로그램을 통해 작년에 표를 구입해두었는데
학생 표라서 역시 자리는 아주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이 자리에 만족하자고 계속 주문을 외웠으나
결국 공연 시작 직전에 뒤로 달려가서 훨씬 나은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라벨 피아노 손을 꼭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ㅠ ㅠ
어쩄든 무대를 보고 조금 오른쪽 자리라서 손은 못 보았고 가끔 피아노 뚜껑에 비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런데 살로넨 정말 멋있었다. 약간 홍명보 선수와 이목구비가 비슷했다 (눈썹은 다르지만).
나중에 엄청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팔과 어깨를 무척 힘차게 휘두르더라.
그리고 확실히 파리 오케스트라도 이 날은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연주하는 듯 소리도 힘차고 굉장히 듣기 좋았다.
드뷔시의 바다 1악장 마지막 부분에선 정말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까지 훌륭했지만 1악장의 움트는 새벽, 해돋이, 강력하고 힘찬, 때론 간질이듯 부드러운 파도소리는 정말 최고였다.

라벨 콘체르토도 정말 좋은 반주였다. 그냥 나는 라벨은... 그저 라벨이 나보다 먼저 태어나 살아주었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피아노도 굉장했다. 내가 피아노에 가까이 있어서 그랬는지 유독 모든 소리가 청명하고 곱고 정확하게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피아니스트도 터치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명료하고 귀에 잘 들어왔다. 다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히 1악장에서, 약간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피아니스트의 감각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상하게 무뚝뚝하더라. 그러나 기술적으로 나무랄 곳은 하나도 없었고 정말 모범적 - 라벨 피아노에 모범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이상하지만 - 인 연주였다. 1악장 첫부분을 들으며 직감적으로 아... 2악장 진짜 느끼하겠다... 겁을 먹었는데 또 의외로 2악장에서는 무척 또박또박 예쁜 소리를 들려주었고 2악장 후반부에서는 심지어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정말로. 인생이 너무나 아름답고 가치있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곡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라벨 이후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피아노 스타인웨이앤썬즈 글자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울먹울먹 하는 모습을 제1바이올린의 부수석 아저씨가 보고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
사족으로 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라벨의 이 피아노 협주곡 처럼 2악장에서 3악장이 쉼 없이 넘어가는 곡들이 참 재밌는데 왜냐하면 자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깨기 때문이다. 내 대각선 앞에 앉은 아주머니는 거의 용수철 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피아노의 다비드 프레는. 진짜 무슨 ... 웃기지만 캔디캔디에 나오는 테리우스 ㅋㅋㅋㅋ같았다.
옛날에 라디오 클래식 Passion Classique 에 나와서 너무 자신감 넘치는 발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에 참 ...음 사람이 참 어리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기 때문에 사실 어제 공연의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과연 이 젊은 음악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 였다. 근데 그가 무대에 등장을 딱! 하는데. 연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참. 어이가 없었다. 리카르도 무티의 사위인데다가. 키도 엄청 크고. 잘생기고. 젊고. 무슨 완전 엄친아... 그의 굉장한 자신감이 어쩐지 조금 납득이 갔다.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 앵콜로 들려준 바흐와 슈만 어린이정경 1번도 참...괜찮았다......

베토벤 7번도 좋았고 난 특히 4악장의 템포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더없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2악장 역시 나쁘지 않았다. 관악 파트에서 조금 더 소리가 곱게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악장이 잘 어우러졌다. 도입부가 좋았다. 그리고 비올라 훌륭했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오늘도 연주가 있는데 또 가고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다.
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대략 2-3일 후부터 citedelamusique.tv 와 liveweb.arte.tv (맞나) 에서 실황을 다시 감상할 수 있다.


AND

으악 옆에 리오넬 브랑기에가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