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콘서트가 자주 있다보니 며칠만 손을 놓으면 이렇게 밀려버린다.
3월 들어서만 벌써 네번의 콘서트를 보았다. 그나마도 3월 5일에 있었던 페트라 랑과 이반 피셔의 공연은 가지도 못했다 ㅠ 그날은 정말 심각하게 피곤해서 나무토막처럼 집에 뻗어있었다.

3월 4일은 정명훈과 라디오 프랑스, 알렉성드르 바티의 토마시 협주곡과 브루크너 7번,
6일에는 윌리엄 크리스티와 Les Arts Florissants 그리고 choir와 몇몇 성악가들,
어제 9일엔 파보 예르비와 파리 오케스트라, 기돈 크레머의 공연이 있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들만 간략하게 적자면...
바티와 라디오 프랑스는 토마시의 트럼펫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어쩐지 3악장에서 솔리스트가 약간 불안하다 싶었는데 앵콜로 3악장을 다시 연주했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한 것이 훨씬! 정말 훨씬 좋았다는 것. 브루크너 7번은 기대를 많이 했는데 3악장 스케르초가 정말 흥미로웠던 것 외에는 머리에 그다지 들어오지가 않았다.

6일 윌리엄 크리스티와 레자르플로리성의 라모 공연은... 18-19세기 음악만 너무 편식한다는 생각에 교육적 ! 차원에서 숙제처럼 보러 갔었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재미있었다. 성악가 분들도 다들 훌륭했고... 옛날 악기들 구경도 재밌었고, 17세기 음악도 무척 신선했다. 여자 소프라노 두 분 (Emmanuelle de Negri 그리고 Hanna Bayodi-Hirt) 과 남자 카운터테너 Ed Lyon 의 약간 오그라드는 연기가 백미였다 ㅋㅋ 연주된 곡은 아나크레온과 피그말리온.

9일인 어제는 오랜만에 아들 예르비씨의 독특한 지휘를 다시 보게 되어서 좋았고.
스티브 잡스 옷차림이 아닌 기돈 크레머도 다시 보게 되어 좋았다.
베토벤의 아주 후기 작품인 Ouverture de La Consécration de la maison (집의 봉헌 서곡.!?) 이 첫 곡이었는데, 제목부터 낯선 이 곡은 파리 오케스트라 역사상 단 3번밖에 연주된 적이 없다. 10분 정도의 간결한 화법. 하지만 몇몇 passages만 들어도 베토벤의 곡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베르크의 천사의 기억에 바치는.바이올린 협주곡. 하지만 그의 천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라파엘로의 아기천사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 정말 멋있다! 딱 "멋있다" 고 생각하며 숨죽였었는데. 기돈 크레머의 연주는 정말 훌륭했다. 행간을, 음표와 음표 사이를 읽는 능력. 지난번 차이코프스키보다 훨씬 좋았다. 2악장은 바이올린에 고압전류가 흐르는 것 같이 멋있었다.

그리고 음... 베토벤 4번도 역시 기분좋게 들었다. 오케스트라석에서 보다가 합창석으로 옮겨서 들었는데 지휘자의 얼굴과 동작들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엄청난 장점이다. 인상적이었다. 기운차고 건강한 연주.

또 5일 정도 쉬고 14일날은 머레이 페라이어의 독주회가 있다.
16일은 라팔 블레하치와 파리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4번 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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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 심포니 4번 Italienne,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바그너의 Siegfried-Idylle, 그리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마무리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멘델스존과 바그너는 아직 지휘자가 제대로 뽑아낼 재간이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정말 그냥 그랬다. 파리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심드렁하게 들리기는 처음이다. 물론 자리가 무척 안좋았지만 그래도 제2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만은 지나치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는데, 지독한 밋밋함이 연주자들의 탓 만은 아닌 것 같았다.
리스트 협주곡들은 정말 좋았는데 아마도 반 이상은 바렌보임의 피아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귀가 굉장히 즐거운 연주였다. 특히 협주곡 2번에서 물 위를 찰박찰박 두드리는 듯한 윤기 넘치는 피아노 소리 듣기 좋았다. 내가 그를 본 짧은 기간동안에도 바렌보임의 흰 머리가 늘어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지만 어쩐지 그의 패기와 집중력은 세월에 무뎌지거나 깎여나가지 않는 모양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의 한 음 한 음 곡의 서사에 벗어남 없이 탄탄하게 응집된 매서운 피아노는 정말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바렌보임의 연주회마다 사람들이 백유로 가까이 되는 티켓을 선뜻 사고 홀을 가득 메우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절대로 관객들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볼 때마다, 그를 처음 보았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 2번 콘서트를 보고 와서도 그렇게 적었지만, 대단한 인물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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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기다렸던 정명훈 공연이었는데
지난 글에 썼던 것 처럼 정 선생님 건강상의 문제로 파비앙 갸벨 이라는 라디오프랑스의 chef assistant (아마도) 분이 대신 지휘를 맡게 되었다.
따라서 별 기대를 안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딱히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연주였다.
오늘 프로그램은 메시앙 - 라벨 - 뒤캬 - 라벨로 이어지는 프랑스 작곡가들 스페셜이었고
전부 재미있는 곡들이었다.
메시앙의 Reveil des oiseaux 인가. 아침을 깨우는 새들 ?
옛날에 Pasdeloup 오케스트라 공연 이후로 메시앙의 곡을 연주회에서 듣는 것은 두번째인데 처음 들었던 곡하고는 느낌이 아주 많이 달랐다. 조금 더 현대적인 느낌이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새 지저귀는 소리가 재미있더라. 그리고 나름 훌륭한 협주곡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점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피에르-로렁 에마르의 놀라운 집중력이 진가를 발휘한 곡이었다. 리옹 출신이라는 점에서 오는 편견인지 몰라도 이 분의 연주는 정말 artisan - 장인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manufacturer 라는 의미는 아니고... 정말 한 땀 한 땀 공들인 철두철미한 연주다.
들리는 느낌이 폴리니 할아버지와 약간 비슷했다.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식의 연주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콘체르토는 그냥 곡 자체가 벌써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뭐라 더 할말이 없다. 으으. 정말 좋다. 라벨의 곡은 모퉁이를 돌때마다 놀라움에 입이 쩍 벌어지고 깨달음에 무릎을 탁 치게 한다.

2부의 뒤캬의 곡은 le Péri - poeme danse (뽀엠 덩세 인데 ...accent 치기 귀찮다)
나름 신선하긴 했으나 딱히 귀가 트이는 구절은 없었다.
다만 약간 영화음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공부를 해야 들릴 듯.

그리고 라벨의 La Valse. 정명훈 선생님이 라디오 프랑스와 같이 연주하는 라 발스를 정말 듣고 싶었는데... ㅠ_ㅠ 너무 아쉽지만. 그래도 오늘 오케스트라 연주 정말 열심히 해주어서 - 지휘자도 물론 괜찮았고 - 연주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그냥 지휘자 분이 중간 중간에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부분들을 좀 휑 건너뛰어버리고 심드렁하게 넘어가 버렸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그 불협화음들과 이상한 그로테스크한 느낌들이 별로 제 맛이 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안타까웠다.
귀가길에 아바도의 연주를 들으며 위안을 삼았다.
이제 3월 1일 피아니스트! 바렌보임의 리스트 피아노 콘체르토들 공연날 까지 며칠간은 또 좀 쉬고.
이제는 1주일만 공연 안 봐도 뭔가가 되게 허전하다. 병이 되었다.



참 그리고 얼마전 파리 마지막 상영관을 기어코 찾아가 Pianomania 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브렌델 할아버지와 피에르-로렁 에마르 아저씨 (외에도 많지만 다 기억이 안 난다.) 가 나오신다.
관객들을 처음엔 웃게 하시고 이내 질리게 하신 그 분 ㅋㅋ
하지만 오늘 연주를 직접 들으니 그 까탈스러움에도 이유가 다 있구나, 하고 탄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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