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파리 오케스트라 그리고 나와 동갑인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치의 연주회에 와있다.

하이든의 교향곡 88번은 소규모 연주여서 인지 소리가 조금 비어보였으나 주법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2악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블레하치가 이어서 들려준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4번은 음...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정말 좋았다.
블레하치는 곧 없어질 것만 같은 콩알만한 작은 얼굴에, 바람에 날릴 만큼 체구도 조그맣다. 숱많은 다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 그나마도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앳된 겉모습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소년같은. 그야말로 소년같은, 얌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한다. 피아노 건반을 중앙에서 반으로 갈랐을 때 오른쪽 높은 음들을 그만큼 아름답게 연주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일 정도...
파리 오케스트라의 조금 작은 듯한 음량도 다감한 피아노 연주에 무척 잘 어울렸다.
더군다나, 4번과 그닥 친숙하지 않은 나 조차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해석이 남달랐다. 여기는 느낌표를 팍 찍어주고 싶다. 현대 피아노 곡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히 어떤 부분이었는지 집어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일단 또래 연주자들보다 훨씬 배짱이 있는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사실 그가 뭔가 트릭! 을 썼다는 것은 직접 편곡한 듯한 무척 신선한 앵콜 곡들을 듣고 나서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오늘 프로그램 내내 일관된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3악장에선 특히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이 더 좋아져서인지. 음. 감동적이었다.
왠지 이 블레하치라는 피아니스트는 원숙한 나이가 되면 누구라도 먼저 손에 꼽을 대단한 연주자가 될 것 같다. 이젠 예언까지.

심지어 지금 웃긴 것은 내가 오늘 도서관갔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으셨던 할머니가 지금 플레이옐에서 내 뒷 열에 앉아계시다는 사실이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흔히 볼 수없는 독특한 안경에 같은 핸드백에 거기다 같은 수첩을 가지고 계시다. 버스 안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수첩을 (죄송하지만) 눈여겨 보았었기 때문에 틀림없다. 같이 오신 친구분들이 부르시는 걸 들으니 성함은 테레즈라고 한다. 버스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할머니에 대해 의도치않게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구나.

여기부턴 집에 돌아와서 쓴다.

프랑크의 d minor 심포니는 그런데 심지어 베토벤 협주곡보다 하이든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무서운 예르비....... 보니까 베토벤도 그렇고 시벨리우스, 오늘 연주한 프랑크, 이런 느낌 곡들을 잘 하는 것 같다. 볼 수록 괜찮다. 볼매야 볼매. 영화음악 같기도 하고 아 너무너무 멋있는 곡이었다. 영화음악 같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굳이 풀이를 하자면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장면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적어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곡들이다. 닥치는대로 듣다보니 유독 그런 곡들이 있더라. 1악장에서 이미 기선제압을 하고. 2악장에서는 클라리넷을 필두로 한 관악기들과 하프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입이 떡 벌어지지만 뭐라 말을 할  수 없다. 3악장에서는 확인사살. 잉..말이 너무 무섭다. 근데 아무튼 뭐라고 해야하지. 그래. 쐐기를 박는다. 그래도 무섭네. 잠시 mute 한 다음에 이윽고 레퀴엠 같은 분위기로 무겁게 가라앉힐 때. 혼자 박차고 일어나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을 정도. 그랬다면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겠지.
근데 다시 말하지만 2악장은 최고였다. 클라리넷 신들린 것 같았다. 워낙 곡을 잘 쓴 것 같다.
집에 와서 바로 열심히 다시 듣고 있는 중. 곡 진짜 멋지다.
우리집 바로 옆에 세자르 프랑크가 살았던 길 (rue César Franck) 이 있어서 왠지 더 반갑다.

오늘 공연은 사실 예전에 미리 예약했던 것이 아니고. 별로 생각 없었다가 얼마전에 루브르에서 루브르 carte jeune 회원들에게 할인 혜택을 준다고 지금 빨리 예매하라고 해서. 왠지 이런 혜택은 꼭 챙겨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13유로 주고 뒤늦게 표를 샀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4유로 더 내고 본 거지만 이렇게 좋은 공연이기만 하다면. (요즘 긴축재정이라 4유로 유독 크게 느껴진다.) 28세가 되기 전에 정말 플레이옐에서 하는 공연은 될 수 있으면 다 보고싶다. ㅠ그냥 그 앞에 텐트치고 살아야 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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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북부 지진과 쓰나미와 원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무척 심란한 가운데
오늘은 머레이 페라이어의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 Johann Sebastian Bach
  • Suite française n°5 BWV 816
  • Ludwig van Beethoven
  • Sonate n° 27 Op.90
  • Johannes Brahms
  • Quatre klavierstücke op.119
  • Entracte
  • Robert Schumann
  • Scènes d'enfants (Kinderszenen) op.15
  • Frédéric Chopin
  • Prélude op.28 n°8 en fa dièse mineur
  • Mazurka op.30 n°4
  • Scherzo n° 3 en ut dièse mineur op. 39
오랜만에 바흐를 들어서 기뻤고. 무척 식상한 표현이지만 듣는 것 만으로도 음표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아하고 고색창연한 프랑스 조곡에 이어, 베토벤에서는 분위기를 확 바꾸어 굉장히 강하고 무게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사실 페라이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베토벤 소나타 때문이었는데, 출발은 그렇게 했지만 갈수록 그의 베토벤은 거의 듣지 않게 되었다. 페라이어에겐 바흐, 모차르트나 브람스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여기다 2부에서 연주된 슈만도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슈만의 어린이 정경 모음곡을 매우 아끼는 나로서는 특히 반갑고 고마운 연주였다. 녹음하고 싶었다 ㅠ ㅠ
정말 정말 좋았다. 꼭 다시 듣고싶다. 앨범으로든 연주로든.
그 다음으로 연주한 쇼팽 3곡은 아마도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우아하고 또렷하고 정갈한, 기품 넘치는 쇼팽이었을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반듯한, 그러면서도 relief가 확연히 드러나는. 이런 말로밖에 표현을 못해서 창피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뭔가 포스와 내공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앵콜로 연주한, 2009년 샤틀레에서와 같은, 슈베르트의 너무나도 유명한 impromptus (D.899 No.2) 는 어떤 경지에 오른 듯한, 가히 완벽에 가까운 만듦새가 놀라웠다. 난 여기서 결국 녹음을 하고 말았다. 넋이 나가서 한참 듣다가 갑자기 용기내서 하느라 마지막 조금밖에 못했지만.
단단하고 아름답고 힘차고 여리고 부드럽고, 모든 것이 들어있는 황홀한 연주였다. 정말 너무 좋더군. 오른손 정말 훌륭했다.
어쩐지 잘 쓰지 못하겠다. 날씨가 갑자기 너무 좋아져서인가. 나가 놀고싶다.
일본에 더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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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문득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음악 과목 시험범위에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생상스의 carnaval des animaux, 베토벤 교향곡,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바흐, 멘델스존, 리스트, 쇼팽, 왠만한 작곡가들의 유명한 곡들은 다 들어있었고 이 곡들을 테이프에 복사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음표를 달달 외워서 시험도 봤는데.
그때는 정말 이 음악이 마음에 하나도 와닿지 않았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당시 아무리 들어도 감흥이 없던 그 음악들을 지금 와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잘 듣겠다고 씨디로 듣고, mp3로 듣고, 라디오로 듣고, 동영상으로 보고, 그걸로 부족해 한 달에도 몇번이고 공연장에 찾아간다. 분명히 나는 한 사람이고 같은 사람인데 2001년의 내가 2011년의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고 2011년의 나는 2001년의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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