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올린 글들의 대부분이 "너무 피곤해서" 등의 넋두리 내지는 투정 비슷한 말들로 시작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렇게 피곤한 날도 있는데 좀 아껴둘 걸 그랬지. 2011년 첫 글 역시 피곤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내 스스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어진다.

어쨌든 오늘 알프레드 브렌델의 렉쳐에 다녀왔다.
이 일은 나에게 많은 걱정과 안달의 해소를 의미하는 중요한 것이었는데
첫째로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를 토막 토막이나마 들었다는 것. 앞으로 이 분을 (심지어 공식적으로 은퇴까지 하셨으므로)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그닥 많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싫지만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둘째로 무서운 동네에서 밤 늦게 그것도 잠기운에 비틀거리며 귀가할 걱정에 요 며칠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우연히 귀가 셔틀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어 나름 편안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셋째로 프랑스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9시 이후에 억지로나마 깨어있을 수 있었다는 것.
넷째로 지금까지 위에 적은 걱정거리들에 대해 사실은 그렇게나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강의 내용.

음악 작품의 위대함은 "연주되었을 때 비로소 실재하는 것이다" 가 아니다. 연주자는 단지 잠자고 있는 음악을 입맞춤으로 (시인다운 표현.) 깨워내는 역할을 할 뿐, 모든 것은 이미 악보 안에 다 들어있다.

phrase 끝 diminuendo 의 나쁜 점과 나쁜 예 강조 또 강조.

각기 다른 해석을 두루 받아들이고 "취향"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이건 아니고 이건 맞다의 기준이 확실하셨다. 헨델의 헤라클레스 중 act II "Jealousy" 부분을 세가지 버전으로 들려주고 어떤 것이 극의 내용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해석인가 를 묻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각각 연주가 누구의 것인지는 불행히도 알 수 없다. 그걸 본인이 직접 알려주면 물론 안되겠지.
투표를 하자고 하셔서 나는 두번째 것에 손을 들었는데 과연 첫번째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신다며 세번째는 이미 음악적인 결함이 있고 두번째 것은 artificial 하다고... ㅋㅋㅋ 공산품에 친숙한 세대라며 변명해본다

그리고 각 note 들에 얼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할 것인가 그게 왜 중요한가 말씀하시면서 베토벤 7번 allegretto 악장을 피아노로 약간 연주해주셔서 무지 기뻤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는 베토벤 appassionata 1악장 처음 부분 (trille의 역할을 설명하시면서), Hammerklavier 1악장, 32번 op.111 의 어떤 부분 (여기에서는 특히 사람들의 박수가 완전 spontaneously 터져 나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 1악장 도입부, 교향곡 25번 1악장 역시 도입부 (이건 diminuendo의 나쁜 예를 설명하시면서 ㅋㅋ), 피아노 소나타 몇번이더라 6번? 7번? 의 한 부분, 슈베르트 moment musical 3번, impromptus 두어곡, 소나타 960번 2악장(아마도) 한 부분.......등등을 짤막 짤막하게 들려주셨다. 또 다른 것도 엄청 많았는데. 조금이나마 연주 들을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좌중을 웃기는 데 능란하시다. 쇼팽에 대해서 새를 가지고 비유했던 것과 노년의 집착에 대한 유머가 특히 고품격이었다. ㅠ지금 정확히 디테일이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만으로도 사람들을 웃기는 거... 역시 대단한 능력이다. 똑같은 곡을 뉘앙스만 조금 다르게 치니까 곡이 순식간에 개그의 소재가 되었다. 덕분에 시차 때문에 불안 불안한 중에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9시가 다 되어가자 아무리 중요한 자리여도 깨어있는 것 자체가 확실히 무리여서 정말 어디 기대 자고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안 쪽 구석 자리에 앉은 남자분이 중간에 나가면서 사람들을 다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잠이 다시 좀 깨서 끝까지 열심히 들었다. ㅎㅎ



결국 생각나는대로 이것 저것 쓰다보니 이렇게 주절주절 말 많을 거면서 뭘 또 피곤하다고 생색내기는... 이상한 사람이다.

어쨌든 이젠 정말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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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옐에서 인터미션 중 글을 미리 쓰고있다 집에 가면 아마 피곤해서 바로 잘듯해서

크레머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처음들어보는데 음 아주 내스타일은 아니다
청량하고 강단있으면서도 바이올린의 거칠고 소박한 면을 매우 다채롭게 표현해내는 연주였지만 그만큼 조금 윤기가 부족하고 차가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연주들과 극적으로 반대된다고 까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악장 바이올린 솔로가 나오는 바로 첫 마디에 이미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맺히는 값지고 남사스럽고 유난스러운 경험을 했다.

유려함과 서정성 그리고 긴장감을 고루 갖춘 플레트네프와 러시아국립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오케스트라로 완전히 곡을 만들어 내더라.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오늘 예상치 못한 폭설로 인해 파리 시내로의 모든 트럭 화물차들의 진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대형 악기들과 악보들과 ㅠ(그래서 쇼스타코비치 5번을 못했다) 무대 의상 ㅋㅋ들이 공연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orchestre de Paris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대여해서 급히 프로그램을 바꾸고 하는 대소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취소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직 이것 때문에 한국에 늦게가는건데 취소됐으면 얼마를 보상해준다고 해도 눈물 났을 듯. 얼마도 아니고 9유로 보상해줄텐데 아마 꽤나 허탈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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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공연들

ouïe/classique 2010. 12. 12. 18:01

12월 4일의 바딤 레핀 +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프로코피에프, 야나첵, 라벨 소나타.
12월 6일의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페도세예프의 "전쟁과 평화" 프로젝트

둘 다 물론 플레이옐에서 있었고.
어떻다 말하기 입 아플만큼 좋은 공연들이었다. 제 값을 주고 봤어도 돈 아깝지 않았을 것 같다. (이건 너무 당연한가.)

레핀의 바이올린은 들으면 기분이 되게 좋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레핀은 연주할 때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인다. 그래서 보고 있는 사람도 덩달아 즐거운 것 같다 ㅎㅎ
아무리 심각하고 엄청난 기교가 요구되는 - 심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 어려운 곡이어도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과 큼직 큼직한 동작으로 슥 슥 연주해내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뭐 사람이 저런가 무서우면서도 ㅋㅋ 기분이 좋다.
베레조프스키의 반주도 훌륭했다. 같이 갔던 친구는 특히 그의 연주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무서운 러시아의 두 거장이 호각을 이루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두 사람이 너무 편안하게 연주를 하기에 그 자체로 음악 외적인 재미마저도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너무 모든게 쉬워서인지 둘이서 약간 기교 잔치를 벌이는 바람에. 바이올린 소나타의 수수하고 질박한 맛은 찾기 힘들었고 (특히 야나첵이나 프로코피에프) 그 곡 자체가 주는 울림보다는 뭔가... 그냥 레핀을 보고 온 느낌이 많이 들었다. 라벨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저번 조슈아 벨보다 훨씬 더 라벨 같았다.

이 날 앵콜곡은 3곡이나 있었는데 그것도 아주아주 긴 곡들로만.
왜인지 본 프로그램보다 더 느낌이 좋더라. 안타깝게도 무슨 곡들이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계속 다시 무대로 나오길래 친구랑 음 저사람들 오늘 뭔가 잘되나보다 하고 귓속말을 했다. ㅋ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페도세예프의 6일 공연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 날 연주된 곡들을 아우르는 주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고 지휘자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 된 일종의 프로젝트 물이었다.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들이 맡은 (나는 러시아 영화를 잘 몰라서. 처음 본 사람들이었으나) 곡 중간 중간에 극적인 나레이션 역시 이 날 프로그램을 특별하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전쟁과 평화라는 키워드가 말해주듯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을 러시아 사람들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였는데 프랑스 관객들이 보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마냥 재밌었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로이카 1악장. 나는 저번 도흐나니 때 보다도 훨씬 좋았는데 1악장 뿐이어서 좀 아쉬웠다. 그 후에는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 서곡과 왈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연주되었다.
1812년 서곡이야말로 이 날의 백미였는데,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정도였다. 작곡가의 이름을 걸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 프랑스라서 뭔가 미운 마음을 담아 필사적으로 연주하는 건지 ㅎㅎㅎ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숨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렬한 순간이었다.
프랑스 사람들마저도 약간 정신을 잃고 미친듯이 환호하더라.
또 듣고싶네. 정말 곡 자체가 너무 멋있다. 공부 좀 해야지. 뭔가 굉장히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곡인 것 같던데 뭐 하나도 모르니 약간 답답하다.
집에 와서 듣는 건 정말 그 느낌이 안난다 ㅠ ㅠ.,,,.으어..다시 듣고싶어

그리고 bis도 두 곡이나 해주었다. 음 ㅠ무슨곡인지 까먹음
그런데 마지막 앵콜곡에서 갑자기 근엄한 타악기 할아버지들이 막 쌈바...악기 같은 요상한 방정맞은 악기들을 막 찰랑찰랑찰랑 흔들어대셔서!!!!
혼자 갔는데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 ㅠㅠㅠㅠ
진짜 아직도 웃기다. ㅋㅋㅋㅋㅋㅋ
아래 사진 오른쪽 위에 네분이서 쑥덕거리며 웃으시는 분들이 바로 그 정열의 쌈바의 주인공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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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라디오

ouïe/classique 2010. 12. 12. 07:50

잘 준비 하려고 침대 머리맡 라디오를 틀었더니
베토벤 17번 템페스트 3악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묘하게 귀에 착착 감기는 독특한 연주다.
누군가 했더니 백건우 선생님.
이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파리에 계신다면 혹시 라디오 듣지 않으실까 실없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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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기에프와 마린스키극장오케스트라의 말러 싸이클 중 아마 두번째 날짜.
오늘 들은 곡은 교향곡 제 2번 Résurrection 이었다.
지난 9월 8일인가 교향곡 8번 공연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짜를 미룬 관계로 표도 예매해놓고 가지 못해서 너무 안타까웠는데 그 뒤로 벌써 세달이 넘게 흘렀으니 꽤 오랜 기다림이었다.

말러의 교향곡들은 정말 재미있다.
혼을 빼놓을 듯 웅장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고고하고 성스럽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또 한없이 진부하고 청승맞고 촌스럽고 신파적이다. 그것도 대놓고...
듣다보면 "이 쯤에선 너는 감동에 겨워 울어라." 하고 자막이 따라 나올 것만 같다. 그것도 아마도 뻘건 궁서체로다가.
베토벤이나 다른 진지한 작곡가들의 allure가 느껴지는 담대하고 영웅적인 패시지에 흠뻑 젖어있는 그 때, 아 정말 좋다, 하는 그 때
곧바로
"뻥이야." 하듯 이어지는
satirique 하고 난스러운 음의 뒤섞임이 순진한 청자를 당혹케 한다.
두 상반된 감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어떤 단어로도 정의"되고 싶지 않아보이는" 그런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대단한 매력이다.

팀파니가 두 대에 다른 타악기들도 많이 나와서 처음에 너무 신이 났는데 (분주한 타악기 연주자들를 보는 건 정말 신기하고 즐겁다) 1악장이 겨우 끝나고부터는 귀도 아프고 머리도 멍멍하고 자꾸 깜짝깜짝 놀래느라 체력 소모가 생각보다 컸다.
나중엔 제발 끝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찌나들 때려대던지. 어쨌거나 마린스키의 타악기 주자들의 능수능란한 솜씨는 과연 관객들의 박수를 독차지할 만 했다. 정말 "솜씨" 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퍼포먼스였다.
특히 객석을 향해 장풍이라도 쏠 듯 오오라를 마구 뿜어내던 심벌즈 주자와 역시 박력 넘치는 2명의 팀파니 주자들은 정말 이 곡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같이, 또 이 곡이 그들의 마지막 무대인 것 처럼 대단한 연주들을 했다. 심벌즈가 그렇게 화려한 악기인지 처음 알았다. 전자렌지가 아니라 무슨 마이크로 웨이브가 꾸불꾸불 장내를 까득 채우는 느낌에 소름이 다 돋았다. 내가 그 바로 앞에 있었다면 그 기에 눌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공연 도중에 몇몇 트럼펫? 주자들과 타악기 주자들이 황급히 무대 밖으로 나갔다가 합창 시작 전에 돌아오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기술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 공연에서만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마지막 악장에서의 합창에서는 ...갑자기 왜 사람을 감동의 도가니에 밀어 넣는지 좀 뻘쭘했다.
그렇지만 그 망설임도 잠시, 어떻게든 거리를 유지하며 비꼬고 싶은 유치한 마음을 망각한 채, 코끝이 시큰해져 울컥하는 결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마무리는 조금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1악장은 정말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9번이 너무 듣고 싶어진다.

옆 뒤 앞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쳐댔지만
아직도 머리가 딩 딩 울리고 엄습하는 피로감에 즐거움과 환호마저도 힘들었던 나는 내 몫의 박수를 보낸 후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내일은 1번과 5번 공연이 있다.
5번이 기대된다. 머리가 좀 덜 아팠으면 좋겠다.
어쨌든 말러의 교향곡은 그냥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것 같다.

오는 18일 미하일 플레트네프 (범죄자.ㅠㅠㅠㅠㅠ), 러시아국립오케스트라와 기돈 크레머의 공연으로 올해 스케줄도 마지막이다. 우와. 어쩐지 정말로 방학을 맞이하는 기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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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꼭 다시 써야지
내일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기차를 타러 가야하기 때문에 길게 쓸 수 없다.
사실 길게 쓰고 싶으나 그러면 안될 것 같다.

쇼팽
24곡의 프렐류드
녹턴 2곡
스케르초 no.1
그리고 에튀드 op.25 중 12곡

그리고 앵콜 4곡 ㅠ
말도안돼
정말 믿기지 않는 행운이었다.


앵콜로는
에튀드 revolutionary
ballade no.1
그리고 앗 뭐였지 음 생각 잘 안나는 아마도 etude 중 하나 조금 귀여운 곡
그리고 마지막에는 역시 etude op.10 no.4.


폴리니의 연주는 내가 정말로 "심취"하는 몇 안되는...... 무엇
모르던 감정들을 깨우고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을 짓게 하는
그리고 소리가 오는 곳이 다르다. 소리가 나는 곳이 뭔가 다르다 참 신기하다.
그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눈을 감아도 다른 연주자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다
전에도 썼지만 정말 새카만 하늘 별을 보고 있는 기분

모든 건반의 울림과 목소리를 알고 있고
곡을 스쳐가는 시간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을 다룰 줄 아는
그런 피아니스트
울림으로 파장으로 어떤 영역을 만드는 그런
분명한 형체가 있는 연주다.

확실히 폴리니 본인의 예전 녹음들이나 최근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작품들에 비해서 등골이 서늘한 박력은 좀 수그러든 듯한 연주다. 그러나 박력만으로 힘만으로 해낼 수 없는
모래알같고 파도같고 바위같은 연주다.

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지만
그래도 프렐류드 op.28 9번부터 15번까지 그리고 마지막 세곡 정말 최고였고
에튀드는 모두 대단했다
발라드 1번 좀 속도가 빠르긴 했는데 아 마지막엔 정말
무슨... 영화에서처럼 눈 앞의 장면이 조각 조각 깨져버리는 그런 착각이 들었다
피아노 소리만으로도 그런 헛것이 눈에 보이더라

근 6개월 만에 만나는 폴리니 할아버지 오늘 꽤 즐거워 보이셨다
사람들 반응도 뜨거웠고



다만 내 옆자리 왠 이상한 남자가 자꾸 다리를 떨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하도 다리를 떨어서 (그럼 내 의자가 같이 흔들린다) 한번 얼굴 쳐다보면서 죄송하지만 이거 그만하시라고 말했는데 전혀 미안한 표정도 아니고 들은 척도 안하더라 ㅋ...
자리를 굉장히 넓게 쓰던데 공연 중에 네번이나 내 발을 자기 발로 쳐서 진짜 짜증났다.
그리고 자꾸 자기 수염을 벅벅 긁어대서 미치는 줄 알았음. 발코니 아래로 번쩍 들어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와서 이런 말 쓰기 싫지만 정말 너무 싫어서 어디다 말할데도 없고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하긴 이런 싫은 일이라도, 이런 너무나 현실적인 terrestre한 사건이라도 없었다면 정말 그냥 비현실적인 시간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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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즐거움

ouïe/classique 2010. 11. 26. 08:35


별 기대 않고 따라간 무료 공연에서 정말 괜찮은 연주를 들어서 기분이 무척 좋다.
올해 5월에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 최연소 finalist 로 기록을 남긴 박종해 씨의 피아노로
Palais-Royal 근처의 Oratoire du Louvre에서 조촐한 리사이틀이 열렸다.
문화원 식구들을 따라갔는데 자리가 그렇게 배정이 되어
피아노 바로 앞 - 그러니까 연주자의 뒷모습을 고작 1.5m-2m 정도 떨어져서 지켜볼 수 있었다.
덕분에 젊은 ? 어린 ?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을 꽤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음... 아마도 앞으로를 기대해도 좋을 만한 연주자다.
그에게 재단 상을 수여한 S.O.S. Talents 재단 회장인 Michel Sogny라는 사람이 그를 virtuose라고 소개하기에, 사실 나는 뭐 벌써 비르투오소 까지...하고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반신반의 했었다.
하지만 왠걸 처음 바흐를 지나 모차르트, 리스트에서 프로코피에프까지 연주가 거듭될 수록 어쩔 수 없이 수긍이 가는 것이었다. 건반을 놀리는 노련함과 재치가 눈에 띄었다.

조금 무른 듯하지만 성실한 바흐도 맑고 경쾌한 모차르트 10번도 괜찮았지만
특히 리스트 소나타와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7번은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들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연주였다. 정확하고 힘있고 또렷하고 리듬감도 살아있는. 프로코피에프와 그리고 앵콜곡들에서는 약간 투박하고 건조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름 그것도 괜찮았다. 내가 듣기로는 미끌미끌 윤기있는 피아노는 아니었다.
앵콜의 쇼팽 에튀드 10-1과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몇번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누구의 곡인지 모르겠는 에튀드 (그냥 연습이라고 말하던데 설마 직접 작곡한 건 아니겠지.?) 도 다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여기서 본 또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넘치는 힘을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듣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만한 박력과 아주 고르고 섬세한 터치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모습이 흔치않은 장점이었다. 일단 어떤 독창적인 캐릭터가 있다기 보다는, 참 "잘 배웠다" 는 느낌이 전반적으로 들었다.
꾸준히 하시면 앞으로 계속 더 잘 되지 않을까요. 오늘 공연 정말 잘 들었고 고맙습니다. 다음엔 표 사서 갈께요. (왠지 검색하다가 이 글을 본인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급 예의 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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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싸이클.
두번째 공연에 다녀왔다.
오늘은 심포니 6, 7번.
이 정도의 연주를 일생에 몇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단원들이 가끔 실수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안났다면 ㅋㅋ.. 그냥 나는 멍한 채로 이게 꿈인지 생신지 분간조차 못하고 멍청하게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단원들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다 베토벤으로 보인다.
틸레만은 왕베토벤....
이렇게 자꾸 귀를 호강 시켜서 큰일이다.
내내 시간이 아름답게만 흘러갔다.
막히는 구석 하나도 없이 유유하게, 높은 산 정상에 올라서서 저 멀리 흐르는 강물과 빼곡한 녹음과 아득한 지평선을 눈 앞에 두고 선선한 바람을 그저 벅찬 감정으로 들이마시는 그런 기분으로 시간이 흘렀다. 뭐라 더 할 말도 없다 이젠.

중간중간 느낀 점들을 두서 없이 막 써놓고 빨리 자야겠다. 다른 음악이 생각날까봐 무섭다
오늘 자리는 1층 발코니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 모서리 쪽이었는데
역시 간이의자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자리를 얻은 것에 마냥 기뻤다.
어제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 왔다. 느지막히 표를 사려 줄을 서는 인파도 엄청났고 계단 통로에 앉거나 기대어서 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어제는 가깝고 시야가 탁트여 정말 훌륭한 자리였지만 관악기들과 내가 집착하는 팀파니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그런 걱정이 없었다. 덕분에 팀파니 주자를 마음껏 노려보았다. 팀파니가 왕자리에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있어서.
지휘자도 뒷모습만 보다가 약간 옆에서 보니 더 이해하기 쉬웠고. 살짝 아쉬웠던 것은 어제 제1바이올린 앞에서 5번째 줄 안쪽에 앉은 연주자 아저씨가 대단한 연기파셔서 얼굴 표정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 분이 무대에 나왔는지 어쨌는지 확인할 길 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잘 계셨겠지... 오늘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재미를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뭐야 이게 ㅋ
그리고 제2바이올린의 수석? 부수석? 아주 어려보이는 밝은 금발의 남자 연주자가 있었는데 오늘은 더 잘 보여서 재밌었다.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하더군. 지휘자와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팀파니와 피콜로 연주가 없는 부분은 너무 괴롭다.
팔짱 딱 끼고 고개 숙인 두 분의 그늘진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
그늘진게 다른게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눈썹 밑으로 그림자가 확 지는데
거기다가 팔짱 끼고 ...뭔가 되게 우울해보인다. 실제로는 뭐 전혀 아니겠지만 괜히 내가 혼자 불안하다. 저기 저 분들 빨리 파트 주라고! 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있는 것이다.
7번 할 때 피콜로 분이 아예 안나오셔서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7번에서 팀파니 파트가 워낙 많아서 역시 이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오늘 가장 칭찬 받은 사람들은 클라리넷, 오보, 플룻, 바순 그리고 호른 수석들.
어제도 그랬다 사실 ㅋ
하지만 7번에서는 플룻 약간 불안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바순도 한번 약간 삐끗했다.
하긴 그나마 그런 실수라도 안했으면 립싱큰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앵콜 없고 커튼콜 한 세번 하고 다들 후닥닥 일어나서 퇴장했다.
사실 피곤할 법도 하다. 난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오길 잘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낯익은 얼굴 되게 많이 마주쳤다 ㅋ 다들 어제 오고 오늘도 오고 또 주말에도 오겠지.

알고보니 틸레만은 kurt가 아니라 폰 트라프 대령이었다... 동안 아니잖아...
완전 풍채 좋으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냥 외모만 보더라도.
오늘은 정확히 6번 3악장 부터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1악장 2악장에서는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얼굴이 붉어짐과 함께 어제 5번때와 같은 온 몸으로 몰아치는 지휘를 시작. 멋지더라.

아 정말 그런데 6번 7번 오늘 너무 다 훌륭해서 뭐라고 더 할 말이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7번이 연주되는 매 초가 정말 너무너무 소중해서 막 씹어 삼키고 싶었다.
베토벤의 의젓하고 기운찬 교향곡들 비엔나 필하모닉과 틸레만은 그냥 다 알고있는 것 같았다. 어제 5번 4악장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되지만 그래도 오늘 연주한 곡들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 재현되었다. 뭐 역시 각자 취향인거겠지만 아 정말 7번. ..으으으
1, 3, 4 악장의 활기차고 건강한 리듬감 기분 정말 좋았다. 집에 오면서 아마 테이프였으면 벌써 늘어졌을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음반을 다시 들었는데 음 여기에 비교해도 역시 괜찮았다.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가사가 없는 그것도 긴 음악을 듣고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은 아니 뭔가 감정이 움직이는 기분을 느껴본 것은 이 곡을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설사 처음이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내가 처음이라고 하면 처음인 거니까. 그렇게 우기고 싶은 것이다. 정말 특별한 곡이다. 그때 이 2악장을 듣지 않았더라면 베토벤이 어떤 사람이건 그 음악이 어떤 것이었건 아마 지금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잘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틸레만의 오늘 연주가 좋았다고 극찬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이 2악장을 훌륭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처음의 솔 도 미 라 그 a minor?? 맞나 아무튼 그 화음이 나올 때부터 가장 끝에 그 가볍게 사라지는 듯한 미묘하고 우아한 마무리까지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흑흑 고맙습니다
그리고 7번 교향곡에서 비올라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비올라 소리가 알고 싶어서 계속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좋은 예가 있었군.

6번도 내가 상상하던 6번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청량하고 담대한. 기분 너무 좋았다.
악보 보고 공부 좀 해보고 싶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 너무 훌륭하다. 그 소리들을 만들어낸 베토벤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그렇다. 귀엽다는게 아이 귀여워 이런게 아니라 막 그... 좀 다른 느낌이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ㅠ
베토벤 전기도 사 읽어야겠네 또...

27, 28일날 남은 1, 2, 3번 그리고 8, 9번 공연이 있는데
뒤늦게 8, 9번 공연도 보러 가려 했으나 (당연히) 이미 매진이다.
또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지금의 나한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하나 더 보게되면 감상문이 감상문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어떡해 짱이야. 이걸로 요약해버릴 듯. 사실 오늘도 집에 오는 길에는 "정말 좋았다" 는 말 외에 더 무슨 말을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위에 써 놓은 것도 뭐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냥 정말 좋은 것이다. 그냥 정말 좋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순수한 기쁨과 전율과 희열 그것이 다였다.





떼아트르 데 샹젤리제. 새삼스럽게 한번 찍어봄



오늘 내 자리.



청중의 뜨거운 환호. 내 앞에 대머리..아저씨가 앉으셨는데 저렇게 왜곡되게 나와서 속상하고 죄송스럽다....



짠 오늘 숙련된 솜씨로 한 장 찍어서 완전 잘 건졌다.



아저씨 또...
그냥 사람들 얼마나 왔는지 찍어 보았다.



집에 가는 버스 기다리다가.
정류장 앞에 일반 버스가 이렇게 버젓이 무개념 주차를 해놔서 당황했는데
자세히 보니 빈필 버스라서 급방긋


AND

오늘 세상을 떠난 두 해군장병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들분께도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공연 감상문을 쓰기를 좀 망설였지만 그래도 목표한 바가 있으니.
팔자 좋은 유학생이라 이런 때 가족들 두고 멀리 타국에 있지만 정말 내내 마음이 편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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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하루에도 몇번이나 생각하고 심장이 쿵쿵 뛸만큼 기대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비엔나 필하모닉의 베토벤 사이클 첫 공연날이었다.
오래전 예매를 하긴 했지만 학생 표라 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J열 가운데열 통로쪽 자리를 주었다. 비록 간이의자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너무나도 당연히 관객들은 온 극장 안에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운좋게도 내 바로 뒷 줄에서만 두자리가 비어서 같은 학생표 출신인 어린 남학생과 잽싸게 이동, 제대로 된 좌석에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바로 뒷자리에 또 에셴바흐 할아버지가... ㅋㅋㅋ
지난 번과 예르비 공연 때 같이 정렬의 빨간색 스카프를 하고 오셨다.
에셴바흐 선생님과 같은 공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괜히 나까지 뭔가 음악인이 된 것 같았다. 우쭐하며 고개를 돌리니 막상 나와 모의하여 자리를 옮긴 꼬꼬마 학생은 오선노트를 꺼내서 숙제인지 뭔지 작곡을 하던데... 나는 급 쭈그러짐.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1부에는 에셴바흐 선생님의 강렬한 코롱 향이 진동해서 좀 힘들었다.
1부의 교향곡 4번이 끝나자 그는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가 떠나자 2부 중에는 계속 호박 물고구마 삶는 냄새가...... 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왜 고구마 삶는 냄새가 났던 걸까.
아직도 그 냄새가 코 끝에 선명히 남아있다. 뭐지 진짜. 누가 고구마 향수를...

어쨌든 오늘의 연주는 베토벤 교향곡 4번과 5번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어본 교향곡은 3, 5, 6, 7, 9번 밖에 없다. 이렇게 계속 편식을 해왔기 때문에 전곡 연주 싸이클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뭔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4번은 내가 들어본 베토벤 교향곡 중에 제일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대충 썼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건 알 수 없고, 쉽게 귀에 와 닿는 곡이었다.

사실 모르는 곡을 들으면 연주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난생 처음 듣는 (하긴 근 2-3년 안에 들은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 실황이 난생 처음이었지) 비엔나 필하모닉 공연에는 객석에건 무대에건 예상대로 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래서 사실 더 긴장하고 더 압도당했는지도 모른다. 1부가 끝나고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강력하다는 것 뿐이다.
"합주"라는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마치 내가 작년에 에릭 봉파르 피겨 보러갔을 때 - 선수들이 다들 잘하길래 어..잘하는구나 했는데 마지막에 김연아 선수가 나오니까 아...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던 경험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정도 충격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압도적이었다.

늘 연주 외의 부수적인 것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은 나는 또 틸레만의 지휘가 너무 신기했다.
얼굴은 엄청난 동안인데 - 그것도 전형적인 독일인의 얼굴 ..!!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차남 Kurt를 닮았다. - 족히 190 cm는 되어보이는 키다리에 거의 10등신. 게다가 너무 예쁜 외투를 입고 지휘했다. 등의 주름이 독특하던데. 아무튼 뭔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귀여움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머릿결이 정말 굉장히 좋고 그 비단결같은 머리를 신나게 흔들며 헤드뱅잉 하듯 지휘를 했다. 제1바이올린 부수석과 첼로 수석이 앉은 쪽을 향해 격정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확 굽혀 보면대에 머리를 부딪히는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 정말 쌔빨개지도록 열정적으로 지휘를 한다. 물론 다른 지휘자들이 얼굴이 상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덜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홍옥처럼 빠알간 얼굴은 (정말 사운드오브뮤직이다) 베토벤의 열기를 시각적으로까지 전달해주는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였다.

자리 원래 주인이 올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의자에 꼭 붙어 휴식시간을 보내고
대망의 5번.
4악장 듣고 또 울까봐 휴지도 주머니에 하나 넣어 놨다.
1악장 첫 과과과광- 을 듣고 내 머리속에는 그저 미쳤다... 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엔 이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잠시 후엔 대체 이런걸 어떻게 만든건가 하는 베토벤에 대한 찬탄과 경외심이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1악장이 주는 임팩트 만큼이나 살떨리는 연주였다. 이거 뭐 이러다간 4악장 까지 가기도 전에 눈물 콧물 다 나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훌륭했다. 넓고 깊고 풍성한 하모니와 정신 못차리게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바이올린이며 날카롭고 정확한 관악, 이미 관객들은 능동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입장이 아니라 음악에 의해 머리 한가운데를 관통당하고 있는 그런 무아의 지경이다.

어느 파트 하나 빼놓을 게 없었지만 제1바이올린과 관악 쪽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을 했다.
2악장에서도 ㅠ 정말 1악장에서 덜덜 떨다가 2악장으로 오니 갑자기 겨울밤에 귀가해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 딱 그 처음의 쩌릿한 느낌. 좋았다. 첼로와 비올라의 활약이 돋보였다. 첼로 파트만 혼자 나올 때의 그 위엄이란. 3악장도 몇몇 부분에서 합주가 정말 어마어마해서 입이 문자 그대로 쩍- 벌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어휴..

준비한 휴지를 꺼낼 일이 없었던 것은 사실 4악장에 이유가 있다. 틸레만의 4악장은 너무 빨랐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서 정말 제일 짧았던 것 같다.
정말 빠르고 패기가 넘치는 파격적인 연주였음에는 틀림 없으나 내가 원하는 4악장은 아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 환희와 괴로움과 격정을 마음 놓고 온 몸으로 흡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연주다.
숨가쁘게 달려와 가까스로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때서야, 지쳐서 바닥에 나뒹굴든 성취감에 흐느끼든 뒤를 돌아보든 할 수 있는 단거리 경주 같았다.
그 와중에도 오직 기가 막혔던 것은 그 가공할 속도를 그대로 쫓아가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모든걸 다 소화해 내는 1,2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들의 실력이다. 전부 현이 한두줄 씩 끊어져서 주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무리 숨가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두번째 주제 부분이라고 해야하나
대충 4악장 1분 쯤에 나오는 그 부분에선 약간 코끝이 시큰했다. 무서운 베토벤.....

아 ! 앵콜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곡인지 전혀 모른다  ^ ^
뭔가 오스트리아 독일 쪽 약간 19세기 말 20세기 느낌이 나는 중후한 곡이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다
+ 우와. 완전 틀렸군.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음악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내가 하루에 저렇게 80분 씩이라도 무언가에 완전히 몰두하는 일이 있던가?
나를 잊을 정도로 내 주변을 잊을 정도로 모든 감각을 다 통제하고 오직 한가지에 집중하는 시간이 하루에 몇분이나 되던가, 하는 물음.
저들에게 음악과 악기가 있듯이 나에게는 책과 글이 있는데.
하루에 최소한 80분이라도 저렇게 완전히 책 속에 빠져드는 때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읽기야 읽지. 이 말이 더 부끄럽다.

내일도 6번과 7번 공연이 있다.
오늘 5번을 듣고나니 무엇보다 7번이 몹시 기대된다.
내일 더 연구를 해보고 또 다른 발견을 해야지.

10유로 내고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는게 대단하다. 나도 자립해서 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의 나같은 학생들이 이런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정말 이렇게 좋은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게 좋은지 별론지 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마련해주고 싶다. 또 먼 훗날 포부 밝히네
일단 40분 집중 해보고 다시 말하자.....





내가 처음 앉았던 간이좌석에서 찍은 사진. 그래도 위치 정말 좋았다.
나와 같은 처지(였던) 학생이 앞에 보인다.



할아버지 얼굴이 빼꼼히 보이길래



마지막 커튼콜 때.
맨날 사진 찍고 촌스럽지만 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 같다.
틸레만 상기된 얼굴이 사진에도 보인다.


+ 같은 날 공연 리뷰가 concertonet.com 이라는 프랑스 사이트에 올라왔다.
필자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다. technically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이유가 있는 혹평이지만
그래도 5번 4악장 빼고는 난 여전히 좋았다는 생각이다.
http://www.concertonet.com/scripts/review.php?ID_review=6995
AND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