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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시 salle pleyel에서 공연이 있었다.
정말 죽도록 피곤하지만 잊을까봐 어디라도 적어놓기 위해.
곡은 리게티의 Concert Românesc,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1번,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었다.
안토니오 파파노의 춤추는 듯한 지휘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아주 움직임이 크면서도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음악 자체에 율동감이 더하고 ..아무튼 거의 춤이었다.
특히 리게티를 지휘할 때는 더 그랬다.
베토벤 때는 솔직히 아르헤리치 보느라고 지휘에 신경을 못 썼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아 이런 표현 너무 진부하지만
그녀는
피아노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 소리가 온몸으로 피부로 와서 닿았다.
독주를 꼭 한번 들어보고 싶다.
청중들의 열광적이고 집요하고 지칠 줄 모르는 박수세례에 그녀는 앵콜로 두 곡이나 더 연주했다.
합주보다는 역시 솔리스트가 좋다.
숨을 쉴 겨를도 없이 아니 감히 엄두도 못내는 채 온 신경을 집중하여 들어야만 하는
행여나 건반에 허투르게 닿을까 스스로가 조심하고 있을 듯 한 손톱 끝마저도 존경하며 듣게 하는 그런 피아노 솔로가 그저 내게는 최고다.
아르헤리치의 피아노는 강하고 우아하고 가벼웠지만 어떤 다른 형용사들보다도 그저 일종의 완벽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피아노 연주를 많이는 알지 못하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완벽인지 모르지만..
눈에서 보는 것도 귀로 듣는 것도 믿겨지지가 않는 그런 비현실적인 시간이었다.
음악에서 완벽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구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테니 어쩌면 그런 기분 만으로도 나는 그것을 완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공연에 갈 때마다 항상 피아니스트들의 솔로 앵콜곡에 경탄하지만 프로그램에는 나와있을 턱이 없으니 곡목을 몰라 애통한 아마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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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que classique.

ouïe/classique 2009. 2. 22. 00:31


집에 돌아가는 길에 씨디를 사거나
나름의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분류된 아이팟 플레이리스트를 남에게 들키거나
사무실에서 자칭 디제이라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틀어놓았을 때
종종 내게 묻는다. 요새 클래식에 갑자기 꽂혔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클래식을 이렇게 들어,
하하 저 원래 클래식 좋아해요.
보통 이렇게 대답하곤 하는데, 그러고보면 "원래"라니.
원래라고 굳이 안붙여도 됐을텐데.. 쑥스럽다.
사실 내가 "원래"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지 클래식음악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처음 내 취향의 음악을 애매하게나마 구별해 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쯤 들어서 부터 였던 것 같다.
그때 좋아하던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나도 같이 들어보려고 이것저것 혼자서 찾아 듣기 시작했던 것이, 계기야 불순했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꽤 공부가 되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목소리가 있구나 이렇게 많은 음과 많은 음의 조합이 있구나, 이렇게 훌륭한 가사들이 있구나.
그 전에는 사실 나도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를 많이 들었고 팝송도 열심히 들었지만 역시... 잘생기고 귀여운 사람들 노래가 역시 좋구나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때 샀던 씨디(자켓)들을 보면 그런 모종의 판단 기준이 매우 명백히 드러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재즈에 엄청 빠졌었다.
그때 멋도 모르고 리뷰만 보고 샀다가 어려워서 듣지도 않고 쌓아 뒀던 고가의 수입씨디들이 지금은 든든한 재산이 됐다. (물론 한국에도 정식 수입되면서 지금 가격은 엄청 내렸다^^^^)
엘라 피츠제럴드와 쳇 베이커, 스탄 게츠를 특히 좋아했는데 지금도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단발머리 교복 차림의 나와 친구들, 학교 교실, 매일 조퇴하던 점심시간의 교정, 대학로, 그 향까지 모조리 눈 앞에 옛 모습 그대로 펼쳐지는 듯 하다. 너무 많이 들으면 그 기억들이 희석될까봐 두렵다. 쳇 베이커에 심취한 나를 보면서 좀 발랄한 음악 좀 들으라고 걱정하듯 말하던 당시의 누군가가 생각난다.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발랄한 음악이 딱히 뭔지도 잘 몰랐고 당시의 내겐 쳇 베이커의 Let's get lost 정도가, 말하자면 제일 신나는 노래였던 것이다. ㅋㅋ

클래식에 '귀가 트이게' 된 것은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대학교 때는 정말 온갖 장르의 음악을 다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클래식에만은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음..그래도 조금 좋아했던 곡은 ........아..생각이 안나...아마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
아, 바흐 무반주첼로조곡은 조금 좋아했었다. 물론 제일 처음 나오는 1번만...
리스트의 라캄파넬라도. 조금.......이건 솔직히 말하면 고시마선생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그냥 보칼리제를 들으면 아 라흐마니노프..하는 정도.
아 맞다, Satie도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물론 Gymnopedie 1번만... 그리고 Debussy의 Arabesque 1번이랑 Clair de Lune은 꾸준히 좋아했던 것 같다.
영화 Shine을 봤을 때 주인공의 피아노와 음악을 향한 미친듯한 열정에 경도하여, 집에 있던 ost를 몇번인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금방 질렸고 집중할 수 없었고 그리고 잊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기란 좀처럼 힘든 환경에서 자라온 나인데.
중학교 때부터 아빠의 서재에 꽉 차있던 온갖 CD, LP판들에다가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 골동품 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을까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했던 무식한 커다란 스피커들, 게다가 컴퓨터의 역사를 다룬 유치한 어린이 과학만화책 한 구석에서나 잠시 봤던 것 같은 기억이 나는, 무려 트랜지스터 이전에 썼다는 "진공관" ...........까지 집에 바리바리 갖다놓았을 정도로 아빠는 나름 꽤나 충실한 뮤지코필이었던 것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아빠의 LP 수집벽(!)은 나를 경악케 했었는데.
그저 한없이 경악케만 했었는데.

2007년 여름 친구를 따라서 그녀의 삼촌이 가르치시는 학생들의 연주회를 보러 무의자 박물관엘 갔었다. 그 다음날인가 처음으로 내 돈 주고 클래식 씨디를 사봤다. 그 연주회에서 들었던 장한나의 쇼스타코비치 첼로를 제일 먼저 찾았고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그리고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랑 리스트 이렇게 세장. 그리고 나서 나오다가 어 새로 나왔네 하면서 Dj Soulscape의 창작과비트 cd를 무심코 샀는데, 집에 돌아가는 차에선 그냥 dj soulscape만 들었다.
아니나다를까.....그리고 차 서랍안에 넣어놓고 그냥 또 잊었다.

그래도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아빠를 꼬드겨 클라우디오 아라오가 연주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랑 파가니니 연습곡 씨디를 샀고 집에 와서 한참 들었다. 스스로가 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la campanella가 든 2번째 씨디를 한국 집에 두고 와버렸고 .........그래서...한참을 못들었다
아빠는 그놈의 리스트 타령을 하더니 잘도 놓고갔다고 어처구니 없어하셨다.
아, 이때 같이 산 요요마 베스트는 무사히 프랑스로 같이 와서 지금도 그럭저럭 잘 듣고 있다.
그해 가을에 쇼팽, 드보르작 등 유명한 작곡가들의 씨디를 한 두개쯤 들어본 것 같은데 인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간다. 왜 그렇게 대충 들었던 걸까

2008년이 되었다. 그 해 여름에야 비로소 정말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정말 알면 알 수록 어렵고 무궁무진한 세계지만 지금까지의 내 짧은 경험으로는 피아노가 제일 좋았고 지금도 제일 좋다. 아마도 내가 피아노를 아주 조금이나마 배워봐서인 것 같다.
피아노랑 첼로가 제일 좋고 바이올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비발디 스타일의 풍성하고 변덕스러운 바이올린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다.
콘체르토 같은 것이 제일 어렵고 싫었다. 교향곡같이 아예 대놓고 웅장한 것도 아니고 솔로 소나타처럼 깔끔하게 집중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콘체르토는 아직 어렵다. 다른게 쉽다는 건 물론 절대 아니고 아무튼 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제일 열심히 들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차이코프스키의 D메이저 바이올린 콘체르토 1악장 그것도 1악장만!)

음..그리고 2008년 8월에는 풍월당에서 개점 몇주년이었나 세일을 크게 해서 씨디를 열 몇장을 사왔는데, 그때 샀던 씨디들을 지금도 잘 듣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빠를 또 닥달하여 입문하는 사람이 듣기 좋은 명반들의 리스트를 뽑아 냈고 무려 수표도 얻어냈었는데. 하하.
생각해보면 이 날은 참 중요한 날이었다. 필요한 음반을 찾느라 진열대 사이를 수백번 왕복하며 종이에 메모해 온 연주가의 이름을 입으로 계속 되뇌여야 했는데 그 이후로 정말 많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리스트 La Campanella를 비롯한 파가니니 연습곡들과 위에 쓴 드뷔시, 사티 이외에 처음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Pathétique, Clair de lune, 쇼팽의 Polonaise 6번 op53 Héroïque이다. 바르톡, 브루크, 차이코프스키도 잘은 모르지만 들어본 것들은 다 좋다.
성악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Pergolesi의 Stabat Mater는 곧잘 듣는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야노스 슈타커, 미샤 마이스키, 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호로비츠, 클라우디오 아라우, 클라라 하스킬, 마르타 아르게리치, 알프레드 브렌델, 다니엘 바렌보임, 에밀 길렐스, 아르튀르 루빈슈타인, 라두 루푸, 머레이 페라이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라자 베르만, 빌헬름 켐프, 바카우스, 발터 기제킹, 루이 로르티, 윤디 리, 랑랑 까지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엄청 열심히 듣고 있다. 같은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음색과 분위기가 나온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재밌어 죽겠다. 아직은 각각의 스타일을 조금씩 구별할 줄 알게 되는 일이 그저 재밌다.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의 valses, polonaises 에 약간 질린 요즘은 슈베르트나 Ravel, Chausson, Saint-Saens에도 눈을 돌리고 있는데..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슈베르트 빼곤 다 프랑스 작곡가네. 
요새는 symphonie에 도전해보려고 하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 같은 유명한 곡들 부터.
작년 겨울에 본 영화 The Fall에서의 베토벤 교향곡 7번이 도무지 머리에서 나가지를 않는다. 영화에서 나왔던 불가리아국립오케스트라의 것이 아닌 Carlos Kleiber의 바이에른주립오케스트라의 연주라는 점이 달라졌지만. 저번에도 썼듯이 클라이버의 씨디를 사버려서 어쩔 수 없긴 했지만
무엇보다 Carlos Kleiber라는 인물에 푹 빠져버린 탓이 크다.

http://www.filomusica.com/filo83/kleibe2.jpg
(photo http://www.filomusica.com/filo83/kleiber.html)

시종일관 어린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기쁨인지 감격인지에 전율하는 듯한 그의 독특한 지휘법이 너무 인상깊었고 그 실력도 출중할 뿐더러 평생 어느 극장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삶이 마음에 든다.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젠 이 분 지휘를 다신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쫌 우스운 생각이긴 하지만 지휘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지성과 감성, 소프트와 하드웨어의 완벽균형체인 것 같아 나중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랑 결혼했으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ㅋ
아빠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2009년부터 LA필 지휘를 맡은 구스타보 두다멜이라는 베네수엘라 출신 81년생 완소 지휘자가 있다며.......서슴없이 내게 정보를 주었다...아버지의 딸사랑..........
LA는 너무 멀고 파리 conservatoire 앞으로 이사를 가던가 해야겠구나.

지난 11월인가 열렸던 문화원 Jeunes Talents Coreens 콘서트 cycle때 나는 내내 들떠있었다.
피아니스트 친구가 문화원 그랜드피아노로 La Campanella를 연습하는 소리가 홀에서부터 어렴풋이 들려오자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내팽겨치고 구심력과 관성의 법칙을 이용해 당장 달려나갔던 것이 생각난다. 이때 어떤 천재 여학생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Waldstein을 듣고 너무 기가 막히고 입이 안 다물어져서 일 끝나자마자 프낙에 달려가 Wilhelm Kempff가 연주한 cd를 사기도 했었다.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Harmonia Mundi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매 주말 행사가 되었고 넓디 넓은 프낙에서도 내가 원하는 씨디를 금방 찾아낼 수 있을 만큼은 실력이 쌓였는데,
정말 음악을 듣고싶은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늦바람에 Salle Pleyel, Théâtre des Champs-Elysées 회원가입도 했고 파리에 있는 왠만한 콘서트홀 홈페이지는 매일 매일 들락거리고 있다. 공연 티켓사느라 돈도 무진장 썼고 cd도 계속 사고 싶고.... 오디오 욕심까지 나면 큰일날 것 같은데 그건 정말 어디서 뭘 사야할지 몰라서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은 티볼리로 잘 버티고 있다. :) 모노지만 그래도 내 수준엔 충분하다.
아빠한테서 뺏어온 티볼리 model one 라디오에 비행기 오버부킹 recompense로 준 돈으로 당장 달려가 구입한 티볼리 cdp.
왠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하하
엥겔지수 엥겔지수 하지만 나는 뭐 말로지수라고 해야할지 음악이나 영화, 책에 쓰는 돈이 집값을 제외한 생활비의 6-70프로는 되는 것 같다. 앞으로 학생요금도 아닌 일반요금으로 콘서트 보러다니려면 정말 돈 많이 벌어야할텐데 걱정이다. 정말 걱정이지만..돈을 쓰는 만큼 나의 용적이 그만큼 되는지, 내 귀와 내 감수성이 그 정도를 받아들일 용량이 되는지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 듣고싶고 보고싶고 한대 얻어맞은 듯한 감동에 이성을 약간 잃고 싶은 열망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니 어쩔 수가 없다.

이번 3월 9일에는 나름 회원이라고
salle pleyel 2009/10 시즌 presentation + 브람스 피아노바이올린 소나타 3번 공연에 초대받음.
프랑스 문화통신부 여러분 씨떼들라뮤직 관계자 여러분 들라노에 시장님 너무 감사합니다.히히
정말 vive la musique이다.




써놓고 보니까 이렇게 길고 두서 없고 주제 없는 글은 나조차도 다시 읽고 싶진 않을 것 같지만
그냥 기록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
아하하하 우연히 salle pleyel 캘린더 보니까 6월 26일날 구스타보 두다멜 파리 온다 ㅋㅋ
라디오프랑스오케스트라와 협연.
아직 말러는 제대로 집중해서 들어본적이 없어서. 게다가 Korngold는 누군지도 모르고.
공부 좀 해야지.
http://sallepleyel.fr/francais/programme/detail_representation.asp?id_rep=19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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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orite piano

ouïe/classique 2009. 2. 10. 21:34





Vladimir Horowitz - Copin Polonaise no.6 op.53 héroïque.
감상포인트 :
큼지막한 손 !
다른 연주가들에 비해 처음부분이 특히 부드러움
표정 변화 하나도 없는 완고한 옆얼굴
그리고 중간중간 틀리심 ㅋㅋ
연주가 끝나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는 귀여운 모습.
어휴 귀여워.



Maurizio Pollini - Chopin Polonaise "Heroique", op.53 no.6




Yundi Li - Chopin Fantasie Impromptu op.66



polonaise는 내가 제일 처음 들어본 아르게리치도 좋지만.. 폴리니와 호로비츠도 재밌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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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떨림이 가시질 않는다.
요즘 나는 정신적인 피곤함을 떨치기 위해 저녁나절의 여가생활에 집중적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데
수요일인 오늘은 이 "문화주간"의 정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주 Salle Pleyel에 가서 CNSM(국립고등음악학교)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를 보고 온 이후로
지금까지 이 도시에 살면서 한번도 클래식 음악회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날 밤 집에 도착한 즉시 음악회 표를 샀다. 두 장이나.
파리에 쿠르트 마주르와 정명훈이 있다는 것이 이 도시의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내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에 그 두 명장의 공연은 꼭 보아야겠다는 다짐이 제일 앞섰다.
그렇게해서 보게 된 것이 오늘 11월 19일 국립오케스트라의 리스트와 브루크너 공연이었다.

공연이 있었던 떼아트르 드 샤틀레(Theatre de Chatelet).





쿠르트 마주르는 올해 81세의 노장으로, 한국에도 몇번 온적이 있다.
물론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아마 부모님은 보러 가셨던 것 같다.
그 팜플렛을 보고 그의 지휘하는 모습을 수채화로 그려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괜히 더 각별하게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굳이 각별히 여기지 않아도 그는 이미 명실상부한 초일류 지휘자인데.
1970년부터 96년까지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고 91년부터 11년간 뉴욕필하모닉의 뮤직 디렉터, 2000-2007년까지는 런던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해왔으며, 2002년부터는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의 뮤직디렉터를 겸해오는 등 지휘자로서의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현재 그는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 직을 맡고있으며 무대에 아직도 자주 오르고 있다.
26일에도 리스트의 Totentanz, 브루크너 교향곡 제3번의 공연이 있고 그 사이 언젠가 오르세미술관에서도 소규모의 공연 일정이 있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콘체르토가 너무너무 듣고싶어서 오늘을 골랐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리스트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 E플랫장조,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 2번이었다. 브루크너는 사실 집중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아빠가 좋아한다는 건 알고있었기 때문에 아마 내게도 어필할거라고 어느정도 검증이 되었던 셈이다.
첫 곡의 주인공은 루이 로르티(Louis Lortie)라는 몬트리올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역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지만 아빠가 괜찮다길래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거장이라고까지 하셨다..
그는,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본 가장 예술적이고 절제된 손놀림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절제되었다기 보다는 계산되었다고 할까, 계산된 것이라해도 너무나도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의 직업에 어울리는 손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겠다.
한 손으로 연주하거나 잠시 포즈가 있을 때 그의 노는 손은 마치 어떤 발레에서 아주 절절하고 호소력있는 연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것은 처음 보았다.
피아노 연주도 아주 매끄럽고 유려했지만, 음악을 직접 어루만지는 듯 한 그의 손은 꽤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숨막힐 듯한 리스트가 끝나고 일종의 앵콜곡으로 솔로를 연주했는데, 깨어질 듯 건반 위를 구르는 선율이 아주 아름다운 곡이었다. 프로그램에 없던 것이라서 곡 이름을 알 수가 없어 너무 아쉽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아주 다채롭고 풍부한 현악기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려주는, 그러면서도 감미롭고 듣기 좋은 것이었다. 비올라의 음색이 참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사실 나는 그 중요성과 대중성에 비해 바이올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바이올린 중 제1 솔로를 맡은 여자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 분의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연주가 기억에 남는다. 브루크너를 연주하던 중 활의 줄이 몇 개나 끊어졌다.

나는 쿠르트 마주르의 지휘를 보아서 무척 기뻤다.
그는 곡이 진행되는 내내 손을 빠르게 떨고 있었다. 때때로 아주 빨리, 오른손을 세차게 떨었다.
나는 그것도 지휘 동작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했지만 내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연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노인을 동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슬픈 일이다.
아니다. 이런 위대한 음악인을, 아직도 내 앞에 살아있는 거장을 겨우 손의 떨림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가엾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치 않다.
몸을 내던지듯 곡을 이끌고, 악기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악보 위로 선율을 끝없이, 조심스럽지만 망설임없이, 덧바르듯 겹겹의 색깔들을 만들어 내던 모습이 뇌리에 그대로 박혀 선하다.
음악은 분명 청각을 통하는 예술이지만 가끔은 눈에도 보인다.
그는 음악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한다.
뒷모습만 봐도 알겠다. 등과 어깨, 다리만으로도 지휘를 하더라.
지휘자의 존재야말로 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런걸 지금까지 왜 안보고 살았을까.
그동안 안보느라 수고했으니. 앞으로는 마음껏 보고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
점점 이 도시를 떠나기가 두려워진다. 좋은 현상이다 :)




ps
떼아트르 드 샤틀레의 0층 오케스트라 석은 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처음 가시는 분이 있다면.)
지하철이 워낙 많이 다니는 샤틀레역(서울의 동대문운동장이나 신도림정도) 바로 앞에 있는 관계로 지하철이 통과할 때 바닥이 미세하지만 규칙적으로 떨리는 게 느껴져서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꽤 신경쓰이는 일일 수 있다. 나도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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