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트라크의 연주를 통해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의 "맛"을 알았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올린 곡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1악장에서 그의 바이올린은 굉장히 따뜻한 소리를 낸다.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정경화씨가 연주한 것만 가지고 있는데 오이스트라크에 비해 훨씬 날카롭고 강해서 한음 한음이 세고 곧게 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오래전 죽은 이 거장의 바이올린 소리가 더 듣기 좋게 들린다.
나만 그랬을지는 몰라도 명징하고 단아한 피아노나 무게있는 첼로에 비해 바이올린은 신경질적이고 산만한 악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조그만 악기가 때로는 세상을 (혹은 적어도 듣고있는 나 한사람만큼은) 다 품을만큼 깊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는게 오이스트라크를 듣고있노라면 그저 수긍이 가는 것이다.
고맙게도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어 찾아 올렸지만 며칠 전 밤 라디오에서 예고도 없이 오이스트라크의 연주로 이 곡이 흘러나왔을 때의 벅찬 기분은 다시 느끼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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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enboim c'est vraiment un personnage.
공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손톱을 다 뜯었다.
네모낳던 내 왼손 엄지 손톱은 거의 삼각형이 되었는데 공연 도중에 왼쪽과 윗면이 "다듬어"지고
집에 오는 길에 공연을 머리 속으로 곱씹는 동안 오른쪽을 또 뜯었다.
방심하다가 크게 한방 먹은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만족스러운 공연은 지난번 폴리니와 하겐 쿼텟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파리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 알아보니 시립은 아니라고 함!)와 음악감독 크리스토프 에셴바크(Christoph Eschenbach)의 지휘, 그리고 피아노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맡았다.
에셴바크 씨는 아주 예쁜 두상을 가졌고, 지휘할 때 양손으로 자꾸 항아리 모양을 그리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쓰니 정말 하나도 진지해보이지 않는구나.

오늘의 프로그램은 베를리오즈 두 곡, 그리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어제도 여기에 썼듯이 한번도 찾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것이 오히려 오늘 공연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 같아 매우 기쁘다.
지난번 페라이어 때 느꼈던 브람스의 생소함과는 반대다.
처음 무대를 연 것은 Benvenuto Cellini, ouverture, op.23.
개성있고 힘차고 강렬하면서도 묘하게 듣기 좋은 곡이었다.
공연을 지켜보면서 계속 느꼈지만 파리오케스트라에선 관악기 연주자들이 특히 훌륭한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오늘 좌석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 (머리 위가 1층 발코니라서 소리가 전달이 잘 안되는 듯) 현악기 특히 바이올린 소리가 다 먹먹하게 들렸는데 정말 너무 아쉽다.

나를 방심케 한 주역, 쇼팽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이 이어졌다.
바렌보임의 우아하고 열정적인 연주에도 불구하고 곡 자체의 원래 특성인지 조금 지루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왜일까... 사실 아직도 개운치가 않다.
곡이 끝난 후 entreacte때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들 너무 대단한 연주였다며 입이 마르도록 찬사의 말들을 늘어놓는데 나만 친구한테 전화해서 별로였다고 털어놓았다. 나중에 다시 들어봐야지..

2부의 시작은 또 다시 베를리오즈의 곡으로, Carnaval romain (로마의 사육제!) 서곡 op.9 였는데 다행히 석연찮던 기분이 다시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정말 독특하고 즐거운 곡이다.
탬버린 ? 비슷한 악기를 흔드는 연주자들이 너무 귀여워서 혼자 웃었다.

마지막 곡으로 쇼팽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이 마련되어 있어 조금 안도했다.
알쏭달쏭했던 2번과 달리 1번은 평소에도 많이 들었었고 또 좋아하는 몇 안되는 협주곡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좋은 연주였다. 달리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죽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3악장을 들으면서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공연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바렌보임의 앵콜곡들이었다.
내가 들어본 어떤 앵콜곡, 아니 어쩌면 어떤 피아노 독주 보다도 가슴 벅차고 멋진 연주들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어떤 콘서트에서의 순간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몇 분이었던 것 같다.
이때 또 손톱을 뜯었다. (물론 이로 뜯지는 않았음.)

그는 오늘 앵콜로 무려 3곡을 연주했다!
그것도 얼마나 재치있게 "연출"을 하던지.
생각보다 쉽게 앵콜 요청을 받아준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쨌건 마냥 좋기만 했던 첫번째 앵콜곡이 끝나고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연주회장을 빠져나기 시작했고 그런 객석을 보더니
갑자기 피아노로 거의 뛰어오다시피(!) 잽싸게 와 앉아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리둥절한 가운데 두번째 앵콜곡을 (고맙게) 들었다.
다들 "지금 내가 본게 뭔가" "저 사람이 지금 정말 뛰어온게 맞나" 하는 의아함과 웃음이 섞인 술렁거림이 가볍게 일었지만 어쨌든 두번째 곡이 끝났으니 이제 정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까보다 더 많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자
본인도 정말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홱 돌아서 피아노 앞에 또 털썩 앉았다.
사람들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나도 막 웃었다.
이런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면서 난 정말 이사람이 "인물이다" 하는 생각을 굳혔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절친한 친구이고 많은 사회 활동을 함께 해왔다는 사실에서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었지만.
뭐든 저렇게 즐겁게 웃으면서 하는 사람이 좋다. 더욱이 아무리 남에게까지 (긍정적인)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어떤 부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하고 만다.
결국 마지막 앵콜곡이 끝나고 다시 한번 또 피아노에 앉는 척을 하더니
이번엔 제1바이올린의 솔로주자의 손을 잡고 끌고 나가다시피 해서 다른 단원들도 그 뒤를 따라 퇴장하여 최종적으로 무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처음 두 곡은 내가 잘 모르는 곡이었는데 세번째 곡은 쇼팽의 왈츠 11번이었다. (아마도)
두번째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느낌이 좀 났지만 아무래도 음악에 관해선 내 기억력을 믿지 못하겠다. 아니면 브람스나 누구 무곡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한데.
쇼팽의 왈츠를 칠 때는 심지어 즉흥에 가까운 기교마저 선보이는 여유로운 모습에 감탄.
연주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나도 나의 이런 격한 반응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보통 남들 눈에 띄는 일은 잘 안함.) 하지만 다들 같은 "상태"였던 것 같다.
마지막 앵콜곡이 끝났을 때는 남아있는 관객 거의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바렌보임의 연주에는 폴리니에게 (예를 들어) 보이는 정밀함이나 "무게"와는 다른 언어로 읽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닥 좋은 귀는 아니지만 내가 듣기엔 오늘 연주에서는 심지어 인접한 음을 대강 다 누르기도 하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랐는데...
물론 나의 대강과 그의 대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에게는 아주 감각적이고 세련된 구석이 있다. 그것도 아주 독보적인.
상대적이긴하지만 그런 점이 꽤 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에 놀랍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운 와중에도 곡의 특징을 잡아내는 감각이 탁월하다.
앵콜곡에서는 실제로 약간의 변주를 했지만 정식으로 연주를 하는 중에도 뭔가 "재간"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잠깐 들 정도로 독특한데. 그런데도 전혀 거슬리질 않으니 이상하다.
마지막 쇼팽의 왈츠는 두고두고 다시 듣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내년 2월에는 리사이틀이 이틀에 걸쳐 있을 예정인데 그 중 하루 표는 이미 예매해 두었다.
다른 날 것도 가고싶은 욕심을 빨리 어디론가 분산시켜야 될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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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들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뭔지 책과 음악에 몰두하고 있다.
Borodin의 Polovtsian dances (Prince Igor) 17번에 완전 빠져서 인터넷에서 계속 찾아 듣다가
드디어 주문했던 씨디가 도착해서 무지 기쁘다. 사실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뭔가에 홀린듯 한 네다섯장을 무더기로 주문한 거라서 너무 충동적으로 산 거였으면 어쩌나 내심 초조했는데,
일단 한 장씩 들어보니 다들 대만족이다. 아닐 수가 없긴하지...

같이 주문한 씨디들은.
우선 Sviatoslav Richter가 연주한 Ravel의 피아노 곡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jeux d'eau 등등, 그리고 Rachmaninov의 Preludes 가 들어있는 것 한 장이 있는데 곡들과 연주는 정말 너무 아름다운데 라이브 녹음이라 처음 부분에 관객들 기침소리가 좀... 기침은 원래 참을 수 없는 건 잘 알지만........ 공연 중에 들리면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리히터와 보로딘 쿼텟의 Schubert 죽음과 소녀(맞나? Death and the Maiden), Schumann 의 피아노 오중주 음반.
리히터의 Schubert 피아노 소나타 19번과 21번. 전에 harmonia mundi에서 Paul Lewis라는 신인 피아니스트의 앨범을 추천해주길래 사서 들었었는데 음...그때 듣던 느낌과는 아무래도 정말 많이 다른 것 같다.
또 리히터. 라흐마니노프 preludes와 Etudes-Tableaux 앨범. 위에 있는 preludes하고는 다른 해에 녹음된 것이긴 한데 아직 그 차이가 별로 귀에 들어오진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람스의 Hungarian dances, 드보르작의 Slavonic Dances 피아노 연탄곡. 여러 연주자들이 있었는데 아빠의 추천으로 Michel Beroff와 Jean-Philippe Collard의 연주를 골랐다.
사실 주문할 때 마침 인터넷에서 리히터에 대한 글들을 읽고 있던 중이어서
리히터 앨범을 무지 많이 주문해버렸다.
또 한가지 요즘 라디오클래식에서 피아노 곡 인기투표를 하고 있어서 매일 가장 "사랑받는" 곡들을 반복해서 들려주기에 매일 듣다 보니, 유명한건 알았어도 예전엔 이렇게 좋은지 몰랐는데, 왠지 자꾸 새롭게 들리는 곡들이 있어서 며칠간 갖고싶은 충동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피아노 앨범만 잔뜩 사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브람스 헝가리무곡 1번이나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그랬다.

요즘 또 자주 듣는 음반은 바렌보임이 연주한 멘델스존의 무언가(Lieder ohne Worte)... 정말 들을 수록 더 매력있고 아름다운 곡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Bach의 키보드 협주곡 음반들을 우연히 읍내나갔다가 프로모션으로 아주 괜찮은 가격에 구입했는데 (Perahia와 Gould, 그리고 David Fray라는 81년생 프랑스 피아니스트 연주) 이건 약간 숙제처럼 듣고 있다. 비교하면서. 나는 아직은 바흐 피아노 곡 중에선 평균율이 제일 좋다. 물론 전자는 협주곡이고 평균율은 피아노 독주지만 아무튼.

그리고 Lipatti의 Besançon récital 앨범에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1악장이 너무 좋아서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찾아 들어 보았는데, "여러"라고 해봤자 Gilels와 Arrau를 들어본 게 전부지만. 아무튼.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명히 같은 곡인데 느낌이 이렇게 다들 다를 수가 있나 놀랍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내겐 리파티의 연주 만큼 좋은 건 없었다.
특히 아라우는... 베토벤 소나타들을 들어봤을 때도 그랬지만 뭔가 피아노 줄 하나하나를 아주 또박또박 탁 탁 당겨서 치는 느낌이었는데, 다만 그런 선명하고 힘 있는 연주법이 이 곡에는 너무 강한 것 같다. 피아노 줄이 아니라 곡이 먼저 끊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굉장히 독창적인 박자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길렐스의 것은 다시 들어보아야겠지만 이 묘하게 우울한 곡의 느낌을 가장 풍부하게 살려내는 능력으로는 (비교의 폭이 너무 좁지만... 저 셋 중에선) 리파티를 따라올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친구가 보내준 서프라이즈 선물
조지오웰 평전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또하나의 재즈에세이.
한글로 된 책이 너무 보고싶었던 요즘인데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좋은 책들을 선물받아 행복하다.
더군다나 더 감동적인 것은... 얼마전 조지 오웰의 1984를 아주 인상깊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곧바로 그 작가에 대한 평전을 챙겨준 친구의 센스와 사려깊음이다. 줄쳐가며 열심히 읽어야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갖는 어떤 종류의 교감도 사실 유쾌한 일이지만 특히 책과 음악에 대한 감상을 나눌 수 있는 건 더욱 즐겁고 또 감사할 일인 것 같다.
어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서 아빠와 친구들과 수다 떨며 음악 실컷 듣고 싶다.
아 그리고 내일은 드디어! 플레이옐에서 바렌보임의 공연이 있는 날이다.
베를리오즈의 곡들은 아직 딱히 찾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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