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올린 글들의 대부분이 "너무 피곤해서" 등의 넋두리 내지는 투정 비슷한 말들로 시작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렇게 피곤한 날도 있는데 좀 아껴둘 걸 그랬지. 2011년 첫 글 역시 피곤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내 스스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어진다.

어쨌든 오늘 알프레드 브렌델의 렉쳐에 다녀왔다.
이 일은 나에게 많은 걱정과 안달의 해소를 의미하는 중요한 것이었는데
첫째로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를 토막 토막이나마 들었다는 것. 앞으로 이 분을 (심지어 공식적으로 은퇴까지 하셨으므로)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그닥 많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싫지만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둘째로 무서운 동네에서 밤 늦게 그것도 잠기운에 비틀거리며 귀가할 걱정에 요 며칠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우연히 귀가 셔틀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어 나름 편안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셋째로 프랑스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9시 이후에 억지로나마 깨어있을 수 있었다는 것.
넷째로 지금까지 위에 적은 걱정거리들에 대해 사실은 그렇게나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강의 내용.

음악 작품의 위대함은 "연주되었을 때 비로소 실재하는 것이다" 가 아니다. 연주자는 단지 잠자고 있는 음악을 입맞춤으로 (시인다운 표현.) 깨워내는 역할을 할 뿐, 모든 것은 이미 악보 안에 다 들어있다.

phrase 끝 diminuendo 의 나쁜 점과 나쁜 예 강조 또 강조.

각기 다른 해석을 두루 받아들이고 "취향"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이건 아니고 이건 맞다의 기준이 확실하셨다. 헨델의 헤라클레스 중 act II "Jealousy" 부분을 세가지 버전으로 들려주고 어떤 것이 극의 내용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해석인가 를 묻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각각 연주가 누구의 것인지는 불행히도 알 수 없다. 그걸 본인이 직접 알려주면 물론 안되겠지.
투표를 하자고 하셔서 나는 두번째 것에 손을 들었는데 과연 첫번째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신다며 세번째는 이미 음악적인 결함이 있고 두번째 것은 artificial 하다고... ㅋㅋㅋ 공산품에 친숙한 세대라며 변명해본다

그리고 각 note 들에 얼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할 것인가 그게 왜 중요한가 말씀하시면서 베토벤 7번 allegretto 악장을 피아노로 약간 연주해주셔서 무지 기뻤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는 베토벤 appassionata 1악장 처음 부분 (trille의 역할을 설명하시면서), Hammerklavier 1악장, 32번 op.111 의 어떤 부분 (여기에서는 특히 사람들의 박수가 완전 spontaneously 터져 나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 1악장 도입부, 교향곡 25번 1악장 역시 도입부 (이건 diminuendo의 나쁜 예를 설명하시면서 ㅋㅋ), 피아노 소나타 몇번이더라 6번? 7번? 의 한 부분, 슈베르트 moment musical 3번, impromptus 두어곡, 소나타 960번 2악장(아마도) 한 부분.......등등을 짤막 짤막하게 들려주셨다. 또 다른 것도 엄청 많았는데. 조금이나마 연주 들을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좌중을 웃기는 데 능란하시다. 쇼팽에 대해서 새를 가지고 비유했던 것과 노년의 집착에 대한 유머가 특히 고품격이었다. ㅠ지금 정확히 디테일이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만으로도 사람들을 웃기는 거... 역시 대단한 능력이다. 똑같은 곡을 뉘앙스만 조금 다르게 치니까 곡이 순식간에 개그의 소재가 되었다. 덕분에 시차 때문에 불안 불안한 중에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9시가 다 되어가자 아무리 중요한 자리여도 깨어있는 것 자체가 확실히 무리여서 정말 어디 기대 자고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안 쪽 구석 자리에 앉은 남자분이 중간에 나가면서 사람들을 다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잠이 다시 좀 깨서 끝까지 열심히 들었다. ㅎㅎ



결국 생각나는대로 이것 저것 쓰다보니 이렇게 주절주절 말 많을 거면서 뭘 또 피곤하다고 생색내기는... 이상한 사람이다.

어쨌든 이젠 정말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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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옐에서 인터미션 중 글을 미리 쓰고있다 집에 가면 아마 피곤해서 바로 잘듯해서

크레머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처음들어보는데 음 아주 내스타일은 아니다
청량하고 강단있으면서도 바이올린의 거칠고 소박한 면을 매우 다채롭게 표현해내는 연주였지만 그만큼 조금 윤기가 부족하고 차가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연주들과 극적으로 반대된다고 까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악장 바이올린 솔로가 나오는 바로 첫 마디에 이미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맺히는 값지고 남사스럽고 유난스러운 경험을 했다.

유려함과 서정성 그리고 긴장감을 고루 갖춘 플레트네프와 러시아국립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오케스트라로 완전히 곡을 만들어 내더라.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오늘 예상치 못한 폭설로 인해 파리 시내로의 모든 트럭 화물차들의 진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대형 악기들과 악보들과 ㅠ(그래서 쇼스타코비치 5번을 못했다) 무대 의상 ㅋㅋ들이 공연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orchestre de Paris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대여해서 급히 프로그램을 바꾸고 하는 대소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취소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직 이것 때문에 한국에 늦게가는건데 취소됐으면 얼마를 보상해준다고 해도 눈물 났을 듯. 얼마도 아니고 9유로 보상해줄텐데 아마 꽤나 허탈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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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공연들

ouïe/classique 2010. 12. 12. 18:01

12월 4일의 바딤 레핀 +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프로코피에프, 야나첵, 라벨 소나타.
12월 6일의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페도세예프의 "전쟁과 평화" 프로젝트

둘 다 물론 플레이옐에서 있었고.
어떻다 말하기 입 아플만큼 좋은 공연들이었다. 제 값을 주고 봤어도 돈 아깝지 않았을 것 같다. (이건 너무 당연한가.)

레핀의 바이올린은 들으면 기분이 되게 좋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레핀은 연주할 때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인다. 그래서 보고 있는 사람도 덩달아 즐거운 것 같다 ㅎㅎ
아무리 심각하고 엄청난 기교가 요구되는 - 심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 어려운 곡이어도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과 큼직 큼직한 동작으로 슥 슥 연주해내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뭐 사람이 저런가 무서우면서도 ㅋㅋ 기분이 좋다.
베레조프스키의 반주도 훌륭했다. 같이 갔던 친구는 특히 그의 연주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무서운 러시아의 두 거장이 호각을 이루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두 사람이 너무 편안하게 연주를 하기에 그 자체로 음악 외적인 재미마저도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너무 모든게 쉬워서인지 둘이서 약간 기교 잔치를 벌이는 바람에. 바이올린 소나타의 수수하고 질박한 맛은 찾기 힘들었고 (특히 야나첵이나 프로코피에프) 그 곡 자체가 주는 울림보다는 뭔가... 그냥 레핀을 보고 온 느낌이 많이 들었다. 라벨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저번 조슈아 벨보다 훨씬 더 라벨 같았다.

이 날 앵콜곡은 3곡이나 있었는데 그것도 아주아주 긴 곡들로만.
왜인지 본 프로그램보다 더 느낌이 좋더라. 안타깝게도 무슨 곡들이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계속 다시 무대로 나오길래 친구랑 음 저사람들 오늘 뭔가 잘되나보다 하고 귓속말을 했다. ㅋ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페도세예프의 6일 공연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 날 연주된 곡들을 아우르는 주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고 지휘자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 된 일종의 프로젝트 물이었다.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들이 맡은 (나는 러시아 영화를 잘 몰라서. 처음 본 사람들이었으나) 곡 중간 중간에 극적인 나레이션 역시 이 날 프로그램을 특별하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전쟁과 평화라는 키워드가 말해주듯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을 러시아 사람들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였는데 프랑스 관객들이 보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마냥 재밌었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로이카 1악장. 나는 저번 도흐나니 때 보다도 훨씬 좋았는데 1악장 뿐이어서 좀 아쉬웠다. 그 후에는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 서곡과 왈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연주되었다.
1812년 서곡이야말로 이 날의 백미였는데,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정도였다. 작곡가의 이름을 걸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 프랑스라서 뭔가 미운 마음을 담아 필사적으로 연주하는 건지 ㅎㅎㅎ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숨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렬한 순간이었다.
프랑스 사람들마저도 약간 정신을 잃고 미친듯이 환호하더라.
또 듣고싶네. 정말 곡 자체가 너무 멋있다. 공부 좀 해야지. 뭔가 굉장히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곡인 것 같던데 뭐 하나도 모르니 약간 답답하다.
집에 와서 듣는 건 정말 그 느낌이 안난다 ㅠ ㅠ.,,,.으어..다시 듣고싶어

그리고 bis도 두 곡이나 해주었다. 음 ㅠ무슨곡인지 까먹음
그런데 마지막 앵콜곡에서 갑자기 근엄한 타악기 할아버지들이 막 쌈바...악기 같은 요상한 방정맞은 악기들을 막 찰랑찰랑찰랑 흔들어대셔서!!!!
혼자 갔는데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 ㅠㅠㅠㅠ
진짜 아직도 웃기다. ㅋㅋㅋㅋㅋㅋ
아래 사진 오른쪽 위에 네분이서 쑥덕거리며 웃으시는 분들이 바로 그 정열의 쌈바의 주인공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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