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잊고 화살표를 그리지 않았는데 일단 코스는 저렇다.

처음에는 이곳 저곳 새로운 코스를 개척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아무래도 산책 코스를 머리 속에 그려놓고 나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보리인 것 같다.

보리는 자기가 가기 싫은 길로는 절대 절대 절대로 가지 않는다.

그 조그만 발로 어쩌면 그렇게 버티는지. 무슨 짐짝처럼 내가 질질 끌고가거나 안아 들고 가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는데, 끌고가면 보기에도 안 좋고 보리도 목 아프고, 들고가면 무거울 뿐 아니라 산책의 의미가 없으니 하기 싫다. 고집이 정말 이렇게 셀 수가 없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웬만하면 보리가 가자는 쪽으로 나도 가는데, 대충 이런 코스로 합의를 보게 된 셈이다.

현재 위치로 표시되어있는 파란색 점에서 빨간 길을 따라 출발하여 노랑과 파랑으로 나눠지는 지점에서 보리가 어디로 갈지 선택을 한다. ㅋㅋㅋㅋㅋ여기서는 그나마 두가지의 옵션이 있는 것이다.

요새는 부쩍 노랑색 1번 코스로 많이 가는데, 이 경우 꼭 place Joffre 중간에서 내가 조금 들고 걸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샹드막스에서 La Parisienne 마라톤 행사를 며칠간 하는 바람에 확성기에 인파에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 보리가 겁을 먹고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인데, 오늘 아침 끝나서 정리하는 것을 보니 이제 괜찮을 것 같다. 오늘은 1번 코스로 다녀왔는데 보리를 들쳐 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2번 길을 나는 사실 선호하는데 조금 짧기는 하지만 무척 조용하고 걷기에 좋다. 1번 쪽으로 가면 너무 사람이 많아서 번잡스럽다. 산책할 때는 개만큼이나 주인의 집중력도 요구된다.

음 지금 passion classique 에서 dowland 의 flow my tears 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구슬프고 좋다.


어쨌든 1번 길로 가는 게 여러모로 운동도 되고 보리에게 더욱 다양한 시각 청각 후각적 자극을 줄 수 있으니 유익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보리 맘대로라는 거.


우리집에서 1,2번 코스가 갈리는 avenue Lowendal 중간 지점까지 대충 900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대충 매일 아침저녁으로 2km 정도 걷나보다. 1번 코스로 멈추지 않고 걸으면 약 4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방해물이 좀 있으면 1시간에서 1시간 반도 훌쩍 지나버린다.


파리에서 강아지와 함께 있어서 좋은 점은 정말 같이 갈 곳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이 걷기 좋은 도시이니 개와 걷기에도 당연히 편안하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을 매번 최소한 5-6명은 보는 것 같다. 보리와 함께 걸으면서 몰랐던 동네 구석구석 (그래봤자 두가지 길밖에 아직 옵션이 없지만...ㅋㅋ) 을 발견하고 또 다른 개 주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하는 일이 이제는 무척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동도 채 뜨지 않은 7시에 서늘하고 이슬맺힌 파리를 맞이하는 것, 유난히 일찍 떨어진 나뭇잎들을 바삭이며 보리와 함께 아침을 헤치고 걸어나가는 것, 그리고 저녁에는 분홍빛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에펠탑과 황금색 앵발리드 지붕을 보는 것. 보리가 없었다면 이렇게 매일 이 기쁨을 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아침과 저녁이 이전과는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또 하나의 멍멍이 주인으로서의 무시할 수 없는 즐거움은 ...우리 개가 너무 귀엽다는 칭찬을 매일 서너번 듣는 것이다. 아줌마 팬들이 참 많다. 그들이 내게 하트 뿅뿅 눈을 하고 다가와서 (그것도 굳이 저 멀리에서 걸어와서) "어머 얘 아직 애기죠. 무슨 종류예요. 어쨌든 너무 귀엽다." 딱 요 말들을 꼭 하는데 ㅋㅋ참. 기분 좋고 으쓱하다. 사실 묘하게 더 내 기분을 좋게 하는 사실은, 세상에 보리가 귀엽지 않았다면 이 콧대 높은 빠리 7구 아줌마들이 동양 여자애에게 이렇게 친절한 눈빛을 어디 한번 보내주었겠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보리가 그들과 그들의 개들에게 관심 1g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유치하게도 나를 약간 더 우쭐하게 만든다.
아참 어제는 집 바로 앞길에서 다른 보더테리어를 마주쳤다. 미국인 모녀가 데리고 다니는 8살난 (벌써 눈썹이 희어졌다) 수컷인데, 보리보다 어깨 높이 기준 10cm는 족히 커보였다. 난 사실 있는지도 몰랐는데 주인 아이가 "There's another Border Terrier!!!" 라고 소리를 쳐서 보니 있더라.

요즘 보리는 아주 잘 걷는다. 킥보드 타거나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애들이나 확성기 시끄러운 음악만 없으면 씨저 밀란이 말하는 ㅋㅋ 완벽한 산책 파트너에 그간 훨씬 가까워졌다. 다만 보리는 나에게 종종 무단횡단을 종용하는데 이것은 좀 고쳐야할 것 같다. 빨리 또 나가서 걷고싶구나. 하지만 해가 조금 더 저물 때를 기다릴테다.


어제는 낮에 비가 많이 와서 저녁 산책을 대비해 우비 겸 털옷을 입혀보았다.
다행히 오후 5시경 비가 멎어 입고 나갈 일은 없었다.

+ 8시 20분, 산책에서 돌아와서 오늘의 루트를 올려본다.
관광객들이 너무너무너무 많은 에펠탑 앞 quai branly 에서는 잠깐 보리를 안고 가야만 했지만 전체적으로 꽤 고무적이었다. 내가 보리랑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잠깐 잊을 정도로 편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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