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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2 怏怏不樂



<봄날은 간다> (2001)




“마음에 차지 않고 야속해서 괴로운 기분”을 뜻하는 ‘앙앙불락’(怏怏不樂)은, 연애의 심경을 꿰뚫는 네 글자다. 사랑에 빠진 이의 시간은, 연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과 지나간 만남을 이리저리 곱씹는 시간으로 양분된다. 나머지 시간은 그에게 벽돌과 벽돌의 틈을 메우는 시멘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작 연인과 함께하는 동안은 어떠한가. 이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는 초조함이 마음의 평온을 위협한다. 연인들은 그래서 가끔 어리둥절해진다. 대체 사랑이 보증한다던 그 완전한 행복의 시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시계가 일치하는 동안 연애는 희열이다. 내가 십 분 동안 세 번 눈을 마주치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도 정확히 세 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지는 한, 사랑은 향기롭다. 그러나 포도주는 쉽사리 쉬고 일식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다. <봄날은 간다>는, 그 ‘매직 아워’를 포착한다.

 

 

서울의 동시녹음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강릉 라디오 방송국 피디 은수(이영애)와 함께 소리를 채집하러 다니다 사랑을 시작한다. 어느 봄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쭈그려 앉은 상우는 멀리 있는 연인에게 전화로 묻는다. “은수씨, 나 그렇게 보고 싶어요?” 택시를 운전하는 친구를 불러낸 상우는 넌지시 떼를 쓴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강릉 산다.” 착한 친구는 가볍게 불평한다. “진짜, 멀리도 산다.” 밤을 가로질러 달린 택시는, 은수가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새벽의 해안도로에 도착한다. 가로등은 아직 총총한데 멀리서 첫닭이 운다. 여자는 달려온 남자가 사랑스럽고, 남자는 기다린 여자가 애틋하다. 용의 목을 벤 기사처럼 의기양양하게 차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여자가 달려와 갈급한 포옹을 나눈다. 사랑은 ‘미친 짓’의 기억으로 인해 위대해진다. 이 순간의 긴급함은 오직 두 연인에게만 통하는 정언 명제다. 남자의 껑충한 어깨에 조그만 여자가 팔을 걸자 둘은 포개져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다시 저들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어질 수만 있다면! 오래전 사랑의 봄날을 통과한 관객의 가슴은 견딜 수 없는 질투로 아득해진다.

 

 “좋다!” 새벽 길 위에서 상우는 황홀하게 탄식하고 은수도 동의한다. 다만 남자는 그 시간이 영원하리라 믿고, 여자는 그것이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안다. “술 먹으니까 멋있다”고 칭찬한 은수는 계절이 바뀌자 “또 술 먹을 거지?”라고 타박한다. 한쪽이 3분마다 사랑을 확인하길 원하고 상대는 4분마다 확인하면 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균열은 시작된다. 티없이 행복했던 어느 오후 은수가 흥얼대는 <사랑의 기쁨>을 상우는 몰래 녹음했다. 허밍에 묻힌 그 노랫말은 이르기를,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그이는 새벽빛에 스러지는 꿈처럼 떠났네. 그러나 심금에 남은 말, 내 사랑은 날 사랑하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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