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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3 나의 미카엘


올 여름에는 유난히도 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까지는 왠지 공부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 전공 서적 외에는 쉽게 손을 대지 못했는데,
결국 완전히 끝낸 전공 서적도 별로 없거니와 무엇이든 일단 읽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짧고 너무 어렵지 않은 소설책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모스 오즈라는 이스라엘 작가의 책이었다. 
늘상 그렇듯 대형 서점의 서가 사이를 산책삼아 구경하던 중, 친구가 날 불러 세우고 권해준 책.
나와 워낙 취향이 비슷하고 그런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려고 책 제목을 몇번이나 되새겼다. 표지는 그냥 그랬지만.
그리고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던 울적한 어느 날 아침 훌쩍 집을 나와 그 책을 샀다.

책은 위안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글 몇줄을 이해하려면 그에 집중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밖에 없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빠져있던 현실에서 조금은 멀어지도록 해주는 것 같다.
약간 거리를 두면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 나의 미카엘이 내게 가져다준 위안은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죽고싶지 않다."
첫 장을 열자마자 이 구절이 나를 강력하게 휘어잡았다. 이 책을 손에 넣은지 이미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 한마디는 나를 처음 그날처럼 긴장하게 한다.
"기억하고 싶다, 잊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나는 죽고싶지 않다."

주인공 한나는 아주 예민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고 그녀의 시점에서 '기록'된 그녀의 삶의 조각들은 더없이 치밀하고 완벽하게, 살아있다. 
과거의 사소한 찰나들이 녹도 하나 슬지 않고 날카롭게 살아있어서 오히려 기억의 주체인 그녀 자신을 아프게 한다. 
죽고싶지 않아서 기억하는 것인데. 죽지 않으려니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아픈 것이다. 

'사실'은 모두에게 객관적이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고 따라서 기억이라는 것은 때로 감정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녀의 미카엘은 그녀의 눈으로 기록되었고 그녀의 머리 속에서 살아있었다.
미카엘은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아프게하고, 경멸하게 하고, 살게 하였다.
그녀의 건조하고 날카로운 애정을 무덤덤한 뒷통수로 느끼며 
그녀의 인생의 순간 속에, 그리고 기억 속에 살았다.
미카엘은 과연 한나의 것이었을까. 
미카엘에게 안녕을 고하는 순간 한나는 기억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았을까.
그리고 죽었을까?

한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나도 모르게 숨죽였던 것은 기억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그녀 위에 재차 겹쳐져왔기 때문이다.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으로 어떤 순간을,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어쩌면 철없는 오만이고 생떼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겐 그 순간을 잃는 것과 같았다.
완벽했던 또는 엉망이었던 어떤 순간,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내 머리속에서 수없이 되감고 재생시켜 보면서 그 순간에 대한 완전한 소유를 주장했다. 
그 순간을 내가 가졌고 그 순간을 내가 살았다고. 그래서 나는 시간에 지지 않았다고.
안녕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버려야하는 걸까

비록 한시적이고 위태로운 것일지라도. 위안은 위안이다. 
이 책이 내게 준 위안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아파야 한다. 기억들이 새파랗게 살아 날뛰는 한 아마도 나는 아플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아픈 것이 당연하다. 
적어도 나는 죽지 않았다.


아프지 않고도 현재를 사는 법을 언젠가는 배워야 하겠지만.
아마도 한나가 그랬듯이

나의 미카엘(세계문학전집 15)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아모스 오즈 (민음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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