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좋은 것들 앞에서는 부쩍 억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침에 밥 먹으면서 오랜만에 아랑훼즈 협주곡을 듣는데
갑자기 또 억울함이 밀려왔습니다.

아름다운 자연풍경 앞에 서거나, 좋은 음악을 듣거나, 가슴을 치는 시를 읽거나 할 때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밉니다.
저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바깥에 있다, 저기로 가려면 먼 길을 돌아 가야 한다, 내 발길은 자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하는 생각들이 하염없이 솟아납니다.

억울하지 않은가요.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매일매일 새로운 시와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하긴 얼마 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150년의 석유문명이 이제 곧 종막을 고하고
인간은 곧 자신이 만든 폐허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때마침 북극의 얼음이 다 녹아 세계는 물에 잠기고
마야력이 가리키는 대로 어쩌면 2012년은 인류 최후의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김수영이 예언한 '미대륙에 석유가 고갈되는 날'이
복사씨 살구씨가 미쳐날뛰는
하지만 인간은 없는, 어쩌면 인간이 없기 때문에 더 자연이 환호작약하는
그런 날이 바로 낼 모레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래서
더 억울합니다.
울화가 치밀어서 못 살겠습니다.




*  * *
10월23일 아빠가 홈페이지에 쓴 글
가끔 아빠는 어쩜 나랑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꼭 내가 쓴 글 같아서 무섭다.
하긴 20년을 넘게 한 집에서 부대끼고 그렇게 많은 것을 함께 보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가족이란건 특히 부모자식간이란건 참 신기하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