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피아노,
지휘자 모드의 아쉬케나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다녀왔다.

이제 정신없는 개학철도 지나고 완전히 "일상" 의 연속.
온 세상에 약속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은 심심한 저녁시간 그렇다면 내가 약속을 만들겠다
두둥 그것은 음악가들과의 약속

외롭지않아 외롭지않다고

아무튼
오늘은 Théâtre des Champs-Élysées 에서 기획한 Cycle Rachmaninoff (이제 프랑스에서도 v말고 ff로 쓰기로 한건지.) 의 마지막 공연날이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3일간 연주하되 매일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협연하도록 된 프로그램이다. 첫날은 엘렌 그리모, 둘째날은 Andrei korobeinikov라는, 다른 관객들 말에 따르면 루간스키보다 훨씬 젊은 러시아 연주자, 그리고 오늘 마지막 날에는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출연했다.
지난 6월 플레이옐에서의 소름 돋는 그리그 협주곡 이후로 두번째 듣는 루간스키의 연주다.

1부에는 피아노 협주곡 3번, 2부에는 교향곡 2번.
지난 날짜에는 피협 2번, symphonic dances, 그리고 죽은 이들의 섬?! 안들어봄 ㅠ그리고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그리고 교향곡 3번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 2, 3번 말고는 열심히 들어본 곡이 없어 생소하고... 교향곡 2번은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오늘 공연을 택했다.

루간스키의 피아노는, 말하자면 본인은 참 쉽게 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그런, 뭐 잘 모르지만 정말 Russian virtuoso 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인...
가끔 허공을 바라보면서 무덤덤하게, 아니 무덤덤정도가 아니라 설렁설렁, 심드렁한 얼굴로 드르르륵 치는데 무슨 뭐 이런게 다 있냐는 느낌.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도, 커튼콜을 받을 때도, 관객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할 때도, 왠지 입으로는 "아이고 뭘요.." "아우 왜요..."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제스쳐와 표정을 하고 있다.

기교적으로는 뭐 다들 말하기를 워낙 뛰어나다니 내가 굳이 더 붙일 말이 없을 것 같고
소리는 청명하고 깔끔하니 듣기 좋다. 그러면서도 폭발할 때는 유감없이.
특히 3악장은 굉장했다.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도 딱딱 맞아 더욱 좋았다.
1악장의 카덴차도 마음에 들었다.
음 그런데 1악장 첫부분에서는 솔직히 좀 어수선한 느낌이 있었다. 처음 주제가 두번째 나오기 전까지는 오케스트라도 피아노도 막 중구난방 흩어지는 느낌이. 그러나 그 이후 잘 되찾아서 뭐... 전체적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다.
앵콜곡으로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5번 (in G Major)을 연주해 주었다. 역시나 별거 아니라는 듯이 후루룩 치고 일어나 쿨하게 귀가하셨다. 라흐마니노프가 특히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쇼팽은 사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아쉬케나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는 사실 난 아주 많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커튼콜을 몇번 안하고 그냥 다들 와 끝이다 하고 집에 가는 분위기여서 좀 아쉬웠다.
그동안 수많은 콘서트에서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접했지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내가 한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한 악단이었다. 역사와 명성을 입증. 시노폴리와 클렘페러와의 연주들도 무척 좋게 들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물론 시대가 다르지만) 그냥 그 모든 것들이 수긍이 간다.
특히 관악과 저음 현악기들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그만큼 어떤 곡에서도 어떤 분위기에서도, 밑둥이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을 굉장히 흔치 않은 메리트라고 보았다. 그 덕분에 라흐마니노프 관현악 특유의 파도처럼 몰아치고 물결처럼 흐르는 바이올린 (+비올라?) 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그 둥둥 퉁기는 베이스가 더욱 잘 살아난 것 같다. 호른도 바순도 트럼펫들도 클라리넷도 오보에도 (플루트는 약간 내가 싫어하는 뷍한 소리가 나서 그냥 그랬음)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개인 실력과 합주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증말 멋지다. 으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은 처음 들어봤는데 음 굉장히 라흐마니노프 같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다던 아다지오 악장은 곡 자체가 좀 느끼했지만 그래도 유명한 이유를 알겠고 좋다고 하는 이유는 알겠더라. 1,2,4악장들은 (내 귀엔) 아주 신선하고 박력있고 또 잘 쓰여졌고 - 듣기 좋았다.
아쉬케나지는 작은 체구에서 (그 유명한 작은 손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고, 그게 심지어 이렇게 멋진 음악 소리로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니 참 인물은 인물이구나 싶었다. 되게 웃기지만 난 공연을 보면서 아쉬케나지가 무슨 마법사처럼 보였단 말이다. 피아노 협주곡이야 본인도 수십번 수백번을 연주했으니 그야말로 손에서 쥐었다 폈다 완전히 자기 것인듯 신나게 지휘하셨고 또 그래서 더 설득력있는 해석이랄까.
다른 연주를 들어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그가 지휘하는 교향곡 2번은 번개가 치고 섬광이 번쩍번쩍 하다가도 여우비가 내리고 잔잔한 물결에 산들바람이 부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곡으로 들렸다. 특히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꽉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일사불란하고 소리를 "잘" 만들어내는 악단 뒤에는 지휘자의 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특히 교향곡에서 그는 완전히 무슨 산신령같았다. 무우도사 배추도사 이런거 말고... 뭔가 그냥 spirit 같았다. 으으. 정말 좋은 공연이었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도 좋지만 지휘도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돼서 무엇보다 기쁘다.
오래오래 건강히 사시라고 간절히 기도해드려야 할 인물 리스트에 또 한 분이 추가되었구나.




귀여운 아쉬케나지 할아버지
정명훈선생님과 함께 하얀폴라파 ^_^
(사진 Theatre des Champs-Ely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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